너의 행복이 나의 기쁨이다.
사람은 사랑 받기를 원한다.
이처럼 눈물겨울 수가 없다.
이때처럼 착하고 유순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일은 어림없는 허구요 현실일 수는 없다.
오직 이편의 꿈이 하나의 거울에 반사했을
뿐이다.
받으려면 주어야 하는 사랑
그것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마음으로 주는 사랑이다.
내어주고 쏟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실천하는 자유이다.
받기만 좋아하고 줄줄 모르는 사랑은 비극이다.
자신이 선하다는 의식 속에서
행하는 선은 더 이상 선이 아니다.
자비의 허상이다.
사랑은 평등을 기초로 하고 존중을 양식으로 삼는다.
지배적인 구조
안에서 너를 위해 할 일을 다 했다고,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평등과 존중은 사라지고 주인과 종의 관계만
남는다.
아이들은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데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고 하는 부모들처럼
일방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재로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빙자하거나 명분으로
삼아
자신을 극대화하여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념이나 가치들을
마치 불변하는 진리처럼 내세우며 가르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틀 안에 사람을 가두고
자유를 구속하였다.
예수는 그 틀을 부수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실천으로 보여 주셨다.
그 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하셨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힘을 내려놓는
자유를 행사하심으로
타인의 자유를 구원하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 왔는가?
지금도
도처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이 사랑의 법이다.
비록 나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박해하는 사람에게도 자유를
준다.
나의 자유를 죽임으로 너를 살린다.
예수께서 당신 최후의 자유를 발을 씻어주는 일로 행하셨다.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내려가야 한다.
어디서부터 내려가야 하는가?
현재가 기준이다. 현재 보다 더 내려가야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수
있다.
내려가서 만나는 것은 지저분하고 역겨움이다.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역겨움을 동반하다.
그러나 거기에 구원이 있고
하느님의 함께 계심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은 하느님 나라이다.
밭에 묻힌 보물은 거기에 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