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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 : 삼등 열차

by 이종한요한 posted Mar 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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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삼등 열차

작가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 1808- 1879)

크기 캠퍼스 유채 66.4 X 90.2 cm

소재지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삼등열차.jpg


예술은 글자 그대로 아름다움에의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작가들은 자연스럽게 삶의 아름다운 부분을 조명하여 표현하게 되었다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신체, 유복하고 여유로운 환경의 아늑함이 작품의 대종이고 이런 작품들이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드물긴 하지만 화가들 중에 평범한 삶의 현실을 힘겹게 살아야 하는 민초(民草)들의 삶, 딱히 비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로던지 생존 경쟁에서 허덕이거나 부조리한 사회 구조 때문에 낙오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그리기도 했다.


이것은 고발성 표현도 되지만 얼굴에 기름기 도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삶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면서 인생을 폭넓게 관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작가는 프랑스에서 어려운 가정에 태어났으나 진작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이것을 키우기 위해 파리에 와서 14세 때부터 서점 외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판화에 몰두하여 4000여점의 판화를 남겼으며, 이 주제의 대종은 작가의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한 것이었다.

 

작가에게 있어 예술은 배부른 사람의 품격 있는 여가 선용의 도구가 아니라, 열악한 삶의 현장을 살아가면서 익힌 체험적 지혜가 여과된 것이었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참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부패와 착취를 일삼는 정치인들과 귀족들의 농간으로 참되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역사의 대열에서 뒤지는 처지가 되어야 했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교회가 기도 속에 조용히 침묵으로 덮어두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서민들의 울분을 풀어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신랄한 사회비판 작품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시민들에게 전해졌으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권력자 가진 자들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받으면서도 단번에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 시민들의 한을 풀어주는 사회적 명사가 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 그동안 몰두했던 판화에서 수채화나 유화로 작품 경향이 바뀌면서 제작된 것이다.

 

이 작품은 기교가 전혀 없이 자유롭게 그려져 있기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조야한 미완성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일 뿐. 조악하게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인위적인 기교에서 해방된 자유의 표현에서 나온 것이다.

 

도시 산업단지에서 하급 노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루의 힘든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삼등 열차 칸의 모습이다삼등 열차칸의 어두운 실내 앞 칸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아낙네와 늙은 노파와, 졸고 있는 사내 아이가 나란히 있다. 그들의 주위에는 무표정한 무기력한 승객들이 있다.

 

열차안의 풍경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퇴근하는 시민들이지만 너무도 하루의 삶에 지쳤기에 서로간의 대화나 웃음 보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집을 향하고 있다.

 

집에 가도 무슨 뾰족한 묘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무엇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냥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들은 같은 기차를 타고 있자만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들의 서글픈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본 -삼등열차.jpg


자는 아기를 안은 여인이 있다. 젖가슴이 부풀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기에게 젖을 줄 시간도 넉넉지 않게 시달린 하루를 보낸 하루의 힘겨운 여정이 드러나고 있다.

 

일을 끝낸 엄마가 주는 젖을 먹고 고달픈 포만감속에 행복한 잠에 떨어진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기쁨이나 생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작업 시간 동안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자식이 자기 품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힘든 일을 끝내고 곧 집에 도착할 것을 기다리는 여인의 표정이다.

 

집에 도착해봐야 이 여인을 기다리는 것은 휴식이나 아늑함이 아닌 아기와 가족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주부가 해야 할 다른 노동이 그녀를 기다리기에 집을 향하면서도 설레임이 없고 기차는 그냥 가야 할 곳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덤덤한 표정이다.


사본 -삼등열차1.jpg


중간에 앉는 노파는 기도하는 모습이다.

오른편에는 딸인지 며느리인지 모를 여인이 있고 왼쪽 아래에 자고 있는 어린 소년은 틀림없이 이 노파의 손주이다.

 

노파는 지그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다. 노파는 자기 인생도 고달프지만 인생을 충분히 산 여인으로서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주위의 무표정한 승객들과 달리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 노파의 기도는 열악한 처지에서 도피처를 찾아 신이라는 존재에 매달리는 것이 기도라는 무신론자들의 빈정거림으로서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기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라는 인격적 신뢰의 표현이다.

 

인생을 충분히 산 노파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심을 믿기에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자신들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녀의 무릎위에 놓인 광우리에는 지친 가족들에게 조그만 기쁨이라도 줄 수 있는 먹거리가 담겨져 있다.

파김치가 되도록 지친 하루 일과에서도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 노파의 모습에서 열악한 삶을 살아가는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신뢰하는 신앙인의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는 비참함이 아니라 고귀한 것임을 보이고 있다.


노파의 아래쪽에 잠에 떨어진 어린 소년이 있다. 그는 하루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일에 바쁜 어머니로부터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하다 열차 안에 들어오자 우선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감을 느껴 어린이다운 태평스러움으로 잠자고 있다.

 

시편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시편 131:2)


작가는 이 작품에서 우리들에게 가난의 영성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는다. 가난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사회 부조리의 결과이기에 해결되어야 하는 것임과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의 가난은 이 세상 어떤 부요함이 주지 못하는 또 다른 행복과 풍요임을 전하고자 한다.

 

가난은 비참과 궁핍의 대명사가 아니란 면에서 성서가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의 말씀은 설득력이 있다.

 

이 열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에서 군중속의 고독을 깊이 체험하고 있으나 비참하게도 절망적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선량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이 언젠가 하느님이 자기들을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이들의 삶이 언젠가 달라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관람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성서의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루카 6: 20)

 

이것과 함께 이들이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는 버려진 인간들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고귀한 존재임을 알리고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작가는 관객들에게 삼등 열차를 타고 있는 인생들에게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눈길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결코 인생의 실패자도 아니요, 비참한 삼등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면서, 이들을 이렇게 만든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의 어두운 부분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종교의 병폐도 종교가 성공신화를 부채질하는 것이고, 이러한 것에 정신이 빠진 사람들에 의해 종교는 양적으로 폭발적 성장은 했으나, 이제 그 어두운 시궁창의 모습이 백주에 드러나고 있다.

 

이런 성공한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교회와, 성공에의 집념을 부채질하는 그 지도자들이 만든 추악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려운 처지에서도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위로의 소식도 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주제의 연작을 몇 개 남겼는데, 판화로 남긴 작품에서 이런 해학적이 내용의 글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질식해 죽을 위험은 있어도 암살당할 위험은 없는 삼등객차의 승객들이다. 삼등객차 만세!”

 

이것은 성서의 다음 구절을 오늘의 현실에서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통쾌한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루카 6: 20)

 

참으로 우리가 잊기 쉬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의 헌실적인 진면모를 너무도 정감있고 따스한 모습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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