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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구(舊)교우촌

by 김맛세오 posted Feb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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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평화와 선

 

 

「기도를 굶으면 밥을 굶겨라」는 마르가리타 지기님의 글을 대하면서

늘 잊혀지지 않던 옛 고향의 정황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가끔 그 동네가 자리했던 (현 현충원 자리) 공작봉 오른 쪽 날개에 해당하는 곳엘 가보면 마치 새벽 물안개 피어오르 듯

그리운 동무들이며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동네 형아들의 이름이 아른아른 떠오릅니다.

 

 더 오랜 세월로 빛바래지기 전에 여기 하나, 둘,...그 이름들을 적어보면,

맨 윗 집의 「영호」형, 바로 아래 침 놓는 집 할머니댁의 아들인「병수」씨, 건너 편 끝자락의 「성택,상택」형 형제들,

바로 옆 집의 「보선,보강,...」남매, 우리 집 아래의 「기철,기성」형제와  그 옆집의「 경례」..

그 아래로 우물이 있는 집- 이렇게 9가구가 동지기 나루터를 내려다 보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단촐한 윗말 동네였지요.

 

 그런데 우리 집 가장 가까이에 있고 저와 자주 만나 뛰어놀던 동무들의 집들이 모두 구교우집이어서

어쩌다 그 집엘 가면 가족들이 모두 모여 기도를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조·만과'라는 기도였던 겁니다.

아마도 박해시절에 피해서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 정착한 마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교훈처럼, 저는 가끔 동무 집에 마실을 갔다가

어떨결에 그런 가정기도를 함께 함으로서 어린 마음 한자리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싹이 조금씩 트인 것이 겠고요.

한번은 성탄 무렵, 성당엘 가려면 몇 고개를 넘어 제법 춥고 먼 길이어서, 꼬맹이 걷는 모습이 안스러웠던지 

경례네  언니가 저를 등에 엎고 흑석동 성당엘 간 적도 있었지요.

 

 한 때는 우물 집 세들어 사는 목수 아저씨가 저녁 시간에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저도 묻어서 교리에 듣곤 했는데, 십이문답 교리 상식이며 구약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었으니

커다란「요리강령」그림 책의 모세 십계명이며 마귀, 천주 심판에 관한 섬칙한 그림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던가, 교리를 듣어야 하는 날임에도 동리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의 쥐불놀이며 깡통을 돌리는

신명난 놀이에 빠져 교리는 아예 뒷전이었으니,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었던 거지요.

어린 마음에도 받은 교리에 대한 상식은 있어서, 밖에서 불놀이를 하면서도 저의 쬐만한 양심은,

"교리 공부를 해야 할 이 시간에 깡통 돌리기에 여념이 없다니...!"하는 은근한 죄책감으로

먼 발치 불 빛이 반짝이는 교리방으로 자꾸만 눈길이 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    *    *

 

그렇습니다. 

구교우촌 동네가 저의 어린시절 고향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제 인생의 크나 큰 은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희 집 어른들도 구교우들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간직하셨고, 저 또한 그런 집 아이들과 늘 함께 놀면서

할아버지 말씀대로 이렇듯 추운 겨울이면 '쥐방구리' 드나들듯 한다는 야단을 맞아 가면서 얼음지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한편 따스한 신앙의 불씨를 피울 수 있었으니까요.

 

 어쩌다 고향, 그 동네 자리에 가보면

모두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있는 낮은 언덕이며 세월의 나무들로 빼곡히 채워진...

어림잡아 볼 수 있는 향수의 흔적들!

한 장 건진 옛 「동지기」사진을 들여다 보면서 구석구석 고향의 밑그림을 마음으로 그리면,

저녁 굴뚝의 고향 연기처럼 평화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겁니다.

 

 신앙과 평화를 심어준, 내 고향 「동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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