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의 종이오니 (Ecce ancila Domini)
작가 :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 1882)
크기 : 유화. 72 X 43cm (1850년 작)
소재지 : 런던 테이트 현대 미술관
하느님은 영원불변하신 분이시나 하느님을 표현하고픈 인간의 열망은 언제나 새로움을 찾게 되기에 성미술 역시 어느 분야 못지 않게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는데,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라파엘 전파 (PreRaphaaelite Brotherhood)의 양식은 성미술 분야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한 예술 운동이다
이 그룹은 당시 런던 왕립 미술원에 다니던 3명의 학생을 주축으로 시작된 운동이며 작품을 소개하는 작가는 그중 한명 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침체 상태에 있는 영국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이태리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성실함과 소박함을 회복해야하며 아카데미즘(Academism)의 원류로 간주되는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1483-1520)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로 새로운 화풍을 시작하게 된다.
이 학파의 대표로 평가되는 작가 로제티는 정치적 이유로 영국에 망명 온 이태리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와 시인으로서 단테 (Dante Alighieri: 1265-1321)가 젊은 시절의 영원한 연인 베아트릭스와의 사랑의 이야기를 서정시로 엮어 신곡의 전편으로 평가 받고 있는 <새 생명, La Vita Nuova>의 번역자로 활동하던 사람인데, 그의 출신 배경에서 이미 르네상스 정신에의 깊은 이해와 그리움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역사의 많은 화가들이 취급했으며 그중에 우리에게도 알려진 유명한 작품으로는 중세기 피렌체의 도미니꼬회 수도자 복자 안젤리꼬 (Beato Angelico)의 작품이 있으나 이 작가는 과거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 주제에 접근하고 있다. 많은 작품을 남긴 이 작가는 성미술 분야에서 <성모 마리아의 소녀 시절>이라는 주제와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작가의 첫 독립 작품일 뿐 아니라 전통적인 성미술의 관점을 벗어난 것이기에 초창기부터 많은 비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이 주제를 다룬 대부분의 그림은 동정녀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성모님의 순종의 관점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어 왔으나, 이 작품은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까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인간적인 갈등 과정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전통적인 천사의 면모와 전혀 달리 날개를 접은 천사는 어떤 위압감 없이 자연스럽고 다정한 모습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접근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의 뜻은 어떤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체험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접근할 수 있는 지상의 사건과 만남을 통해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전하고 있는 백합화는 마리아의 잉태는 위에서처럼 비록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면서도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범상치 않는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천사를 맞는 성모님의 모습 역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다. 많은 작가들이 천사를 맞는 성모님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여기 성모님의 자세는 인체의 모형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는 S자형으로 우아하게 표현함으로서 성령의 도구로 선택되는 성모님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성처녀(聖處女)이기 이전 우리 삶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삶 안에서 나마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꿈을 지닌 처녀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천사의 알림을 듣는 처녀 마리아의 표정 역시 각별하다.
대부분의 다른 화가들은 이 주제를 성모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셨는지를 강조했다면 작가는 이런 응답을 하기 전 과정, 즉 루까 복음 1장 29절에 나타나고 있는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기에 천사를 맞는 성모님의 모습은 의혹과 당황, 갈등의 표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모님 앞에 있는 붉은 색깔의 막대기는 당시 처녀들이 집안에서 하던 길쌈 도구이며 뒤에 있는 푸른 성모님의 뒤편에 가려진 푸른 빛 커튼은 그녀가 아름다운 젊은 꿈을 지닌 평범한 처녀였고, 그 뒤의 등잔불은 그녀에게 충만했던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신앙이란 평범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 살아가는 비범함 삶임을 강조하는 작가의 특별한 착상이다.
과거 많은 작가들은 성모님의 옷에 신성과 인성의 상징인 두 색깔을 사용했는데, 작가는 이것을 분리시킴으로서 그분은 우리와 너무 닮은 허약함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그러기에 성모님이 우러러 공경해야 할 대상만이 아닌 우리 곁에 평안히 함께 하면서 사귐을 가지고 본받을 수 있는 친구로 묘사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도구로 살기 위해선 우리가 겪어야 하는 여러 사건들과 만남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많은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에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로서의 관점의 강조가 그를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지게 하기에 그분을 본받기보다는 공경의 대상으로 보는 게 더 적합한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또한 성모님은 치렁치렁한 수도복을 걸치고 속세와 절연된 삶을 살고 있는 봉쇄 수녀들처럼 너무 맑고 너무 고상해서 오욕칠정(五欲七情)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어떤 동질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그런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이 그림은 처녀 마리아가 여러 면에서 우리와 너무 닮은 점이 많은 평범함을 강조함으로서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작가의 여성관은 전통적인 동정녀 신앙 안에서 길들여진 온통 순결하고 거룩함으로 일관된 탈성(脫性)의 존재가 아니라, 모든 인간, 특히 여성들에게 있는 두 개의 상반된 성향, 즉 천사의 성격과 원죄의 업보(業報)로 남성을 죄에 빠트릴 수 있는 유혹자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심취했던 단테 문학의 영향이며, 이것은 또한 그의 결혼생활과 여성편력에서 여과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 경향을 깊이 이해하는 동료였던 엘리자베스 시덜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고, 그를 모델로 해서 단테나 중세의 로멘스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그리면서 아내이기 이전 동료로서 깊은 애정과 우정 관계 속에 살고자 했으나, 너무도 탐미적인 성향이 강하던 그녀가 마약 중독으로 숨지게 되면서, 그의 결혼 생활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게 되며 방황의 시기를 겪게 된다.
이런 아픔과 상실 체험을 통해 그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모든 인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구원 문제를 작품을 통해 표현코자 했으며 단테의 신곡(Divina Commedia)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즉 죄와 벌의 세계인 지옥으로부터 시작해서, 죄의 묵상과 정화의 세계인 연옥을 거쳐,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과 축복의 세계인 천국을 향한 순례자로서 여정을 살아가는 인간을 그리며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허약함을 고스란히 지니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인류 구원사업의 협력자로서 큰 역할을 하신 성모님을 제시함으로서 우리에게 더 가까운 존재로서 성모님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불행하고 처참한 시작에서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단테의 신곡적 인생관의 낙관적인 면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동안의 교회 신학은 성모님의 동정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이 주제에 접근했던 많은 작가들도 이 영향을 받아 마리아의 또 다른 중요한 모습,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에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 (루까복음 1장 26절)의 모습, 즉 우리의 처지와 너무 비슷하고 닮은 마리아의 모습을 소홀히 했는데, 작가는 이 작품에서 우리의 실상을 마리아를 통해 제시함으로서 우리 모두가 매일 일상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성모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희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끝으로 지하철, 시장, 성당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우리의 자매와 너무 닮은 성모님이 선명한 후광을 쓰고 있는 것은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대로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에는 물론 오늘도 전통적인 성모신심을 지닌 이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나 작가가 의도하는 작품성을 소화했을 때 우리의 신앙이 훨씬 더 성숙해 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