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유혹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많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유혹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실 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를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유혹을 받으셨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늘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유혹자가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앉으나 서나 하느님의 숨결과 사랑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우리의 유혹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가장 큰 유혹을 들라면 다음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식욕, 재물욕, 성욕, 명예욕, 권세욕입니다.
그런데 욕심은 본능입니다.
본능은 중립적 가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게도 될 수 있고,
나쁘게도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먹는 것과 관련된 식욕은 그 자체로 본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때로 식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식욕을 넘어선 식탐은 나쁜 것입니다.
이 조절을 누가 합니까?
본인 스스로가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랑과 관련된 본능을 볼까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찾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세상을 살겠습니까?
사랑은 우리에게 의미의 원천입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멀면 불행이 따라옵니다.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권세욕....
이 욕심은 그 자체로는 중립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습니다.
이 조절을 누가 합니까?
우리 각자가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걸 잘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이를 인성교육이라고 합니다.
이 교육을 누가 해줍니까?
부모님이 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해주어야 합니다.
본인이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성교육을 시키고, 기술교육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인성교육은 바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유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자주 회식을 합니다.
회식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요.
그동안 고생했다고, 축하한다고, 단합을 도모한다고.... 회식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 회식하면서 2차, 3차를 간다면
그 회식은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걸 조절해야 합니다.
2차 가는 거.... 그게 유혹입니다.
뭐든지 좋을 때 헤어지는 게 좋습니다.
유혹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일상의 삶에 숨어 있습니다.
뭐든지 적정한 한도를 넘으면 유혹입니다.
뭐든지 조절 능력을 상실하면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각자의 비결에 달려 있습니다.
노력을 해야겠지요.
결단을 해야겠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을 무기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령을 항상 의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늘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늘 알아차리셨습니다.
가장 큰 무기입니다.
우리도 이 무기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소서.
만일 빠졌다면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슬기와 겸허를 주옵소서.
성령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게 하옵소서.
아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많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유혹을 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실 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구를 넣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유혹을 받으셨을까요?
모를 일입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분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늘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유혹자가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앉으나 서나 하느님의 숨결과 사랑을 알아차리셨습니다.
우리의 유혹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가장 큰 유혹을 들라면 다음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식욕, 재물욕, 성욕, 명예욕, 권세욕입니다.
그런데 욕심은 본능입니다.
본능은 중립적 가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게도 될 수 있고,
나쁘게도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먹는 것과 관련된 식욕은 그 자체로 본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때로 식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식욕을 넘어선 식탐은 나쁜 것입니다.
이 조절을 누가 합니까?
본인 스스로가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사랑과 관련된 본능을 볼까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찾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세상을 살겠습니까?
사랑은 우리에게 의미의 원천입니다.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멀면 불행이 따라옵니다.
사랑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식욕, 성욕, 재물욕, 명예욕, 권세욕....
이 욕심은 그 자체로는 중립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선도 될 수 있고, 악도 될 수 있습니다.
이 조절을 누가 합니까?
우리 각자가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걸 잘 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
이를 인성교육이라고 합니다.
이 교육을 누가 해줍니까?
부모님이 해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해주어야 합니다.
본인이 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지성교육을 시키고, 기술교육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인성교육은 바로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유혹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자주 회식을 합니다.
회식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지요.
그동안 고생했다고, 축하한다고, 단합을 도모한다고.... 회식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 회식하면서 2차, 3차를 간다면
그 회식은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걸 조절해야 합니다.
2차 가는 거.... 그게 유혹입니다.
뭐든지 좋을 때 헤어지는 게 좋습니다.
유혹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일상의 삶에 숨어 있습니다.
뭐든지 적정한 한도를 넘으면 유혹입니다.
뭐든지 조절 능력을 상실하면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각자의 비결에 달려 있습니다.
노력을 해야겠지요.
결단을 해야겠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을 무기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성령을 항상 의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늘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늘 알아차리셨습니다.
가장 큰 무기입니다.
우리도 이 무기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소서.
만일 빠졌다면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옵소서.
슬기와 겸허를 주옵소서.
성령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게 하옵소서.
아멘.
신부님의 옥체검안을 기원합니다
또한 유혹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일 없도록 밝은마음 주시고,
유혹에 빠졌을 때도 그것을 인정하고 똑바로 볼 수 있게 하소서.
유혹에 걸려넘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으나, 걸려 넘어졌을 때, 무엇으로 일어나는가도 중요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