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얼음과 바다(1823~1824)
작가 : 카스팔 다비드 프레드릭(Caspar David Friedrich)
크기 : 캔버스 유채(126.9 x 96.7cm)
소재지 : 독일 함브르크 시립 미술관
요즘 기후재앙으로 생기는 문제들이 전세계적으로 번지고 있는데, 과거엔 이런 문제가 가난하고 문명 발달이 늦은 지역에 생기는 문제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은 장소의 구분이 없이 온 세계적 상대적으로 상당한 문화와 경제력을 갖춘 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워낙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보니 여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다 못해 휴대용 선풍기라도 준비할 기회라도 있었지만, 안정된 나라일수록 이런 위기대응의 경험이 없다보니 우리의 상상하기에도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주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전 네팔에서 일어난 산사태를 동반한 홍수로 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는 인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사고의 원인 제공은 인도와 중국 같은 인접국에서 과잉 사용한 에네지의 병폐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덮쳐 큰 사고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수익자 부담이라는 인간 사회의 원칙이 아니더라도 사고의 원인 제공을 한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게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이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가령 독일 같은데서 어떤 마을이 갑작스러운 홍수로 없어지는가 하면 혼자 살고있던 노인네가 더위를 이기지 못해 사망하는 예도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작가는 19세기 독일에서 살았던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남긴 작가로 인간 내면세계 종교적 영성,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과 무한한 자연의 대비를 화폭에 담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교훈을 주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 제작을 위한 영감을 당시 유럽 전체의 영웅으로 부각되고 있던 영국 장교 윌리엄 에드워드 패리경의 극지방 항해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페리경은 1819년 북서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북극 탐험을 이끌었는데, 이때 그는 거대한 빙하에 갇혀 10개월이나 고립되는 극한의 시련을 겪어야 했고, 그 후 이 기록이 출판되면서 유럽 사회 전체에 엄청난 감동과 관심을 주게 되었다.
작가도 바로 여기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즉, 작품 우측 하단에 얼음덩이에 무참히 깨지고 묻혀 있는 배의 돛대를 묘사하여 페리 탐험대가 도전해야 했던 위험과 극단적인 위험의 현장을 그렸다.

페리경의 보고서에 나타나는 현장인 북극은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작가는 칼날처럼 뾰쭉하게 치솟은 얼음산과 짓눌린 인간의 작품인 배를 대비시켜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자연의 위력 앞에 비참할 정도의 무력함을 보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연출했다.
페리경의 북서항로 개척은 인간의 한계점에 도전한 자랑스런 것이긴 해도 인간의 오만함과 자기 분수를 모르는 행위를 상징하고 있다. 당시 영국의 산업혁명과 항로 개척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면 된다는 그는 극단의 오만의 착각에 빠졌을 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경고를 주고 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작가는 이 사건을 인간 능력의 유한함과 하느님의 영원함이라는 종교적 철학적 메세지 전달의 좋은 예로 활용했다. 배를 삼키고 있는 거대한 빙하의 정적은 죽음과 절망을 뜻하는 반면 차거운 하늘 너머로 비치는 빛을 통해 크리스챤적인 초월과 영생의 확실한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당시 유럽인들의 혼을 빼앗을 만큼 매력적인 사건에서 간과하고 있는 이런 관점을 제시함으로서 이 작품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 중 가장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가는 앞에서 언급했고 작가의 작품 구성에 큰 동력을 제공한 페리의 성공보다는 그가 겪은 역경의 순간에 한때 배가 얼음덩어리 사이에 끼는 바람에 느껴야 했던 공포와 좌절을 더 부각시켰다. 얼음에 갇힌 페리경의 범선은 대자연의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서 인간의 도전과 열정은 참으로 무모한 과욕에 불과할 뿐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간들은 페리의 천신만고의 노력 후 얻은 성공을 일방적으로 부각하면서 이 사건이 주는 중요한 교훈을 감추고 있음을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는 단순한 예술가이기 이전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바로 제시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작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이어서 누이가 죽고나서 곧 이어 함께 스케이트를 타던 형이 얼음물 속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익사하는 참상을 겪었는데, 특히 형의 죽음은 작가의 삶에서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작가의 인생은 외부적 관심은 차단되면서 점점 내면화 된 가치에 눈뜨게 되고 이것이 작품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를 그토록 사랑하며 혼신의 노력을 다한 형 역시 자연의 위력 앞에 너무도 허망하게 사라져야 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절망하기 보다 인간 삶의 한계를 자연의 위력을 통해 체험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작가에게 빙하는 거대하고 거부할 수 없는 질서이자 생명이 정지된 냉혹한 자연의 상징이어서 솟구친 빙하의 모서리들은 마치 고틱 대성당의 첨탑처럼 날카롭게 그려져 있어 인간의 도피를 막지 않는 신성의 준엄함을 상징하고 있다.
네팔에서의 비극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교훈을 주는 것은 철학적인 것만이 아니다. 지질학자들은 네팔과 비길 수 없이 발달한 우리 나라에도 이런 비극이 닥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 해결의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막을 수 있는 특별 장비나 기술을 계발하는 것 못지 않게 자연의 위력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존재성에 눈뜨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은 작가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로 들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오늘 인간들이 인공 지능까지 계발해서 더 없이 우쭐되는 오늘 현실에서 크리스챤으로서 지녀야 할 중요한 기억으로 볼 수 있다.
시편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작가와 다른 관점에서 인간들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우쭐거려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보라 주님의 선물은 자식들이요 *
태중의 소출은 그 상급이로다.
(시편 127,1-3)
이런 면에서 자연의 위력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작품은 오늘 현대인들이 새겨 들어야 하는 것이면서도 너무도 소홀하고 있는 하느님의 능력의 표현인 자연의 위력에 관심을 키워야 할 좋은 관점을 제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