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복음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 대한 불행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불행 선언 때문에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지 주님을 옭아매려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시며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참 따듯하고 고맙습니다.
우리도 제자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그렇게 불러주시면 우리는
주님의 벗이라는 자의식을 그에 걸맞게 가져야겠지요.
주님께서 우리를 나의 벗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개뿔 무슨 벗이야! 하고 말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벗의 지위를 우리가 걷어차는 불행이겠지요.
어제 주님을 적대시하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불행하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그분 벗의 위치로 오를 기회를 걷어차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적대시하는 자들과 결국에는 같아지는 것이지요.
이와 달리 어제 축일을 지낸 성녀 데레사는
어제 성무일도 독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벗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벗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주님의 사랑을 사랑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잘 이해하지 않으면 모순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십니다.
두려워하라고 하셨다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니까 우리보고 두려워하라고 하시고 또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하시는 것인데
그것은 하느님은 두려워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물론 폭군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지요.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그런 두려움이고,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다른 사람은 일절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너무도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 사랑을 잃을까 겁나는 두려움이고,
그것만 두렵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완전 의탁하기에 다른 두려움은 없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너무 두려움에 관한 얘기만 했는데
주님의 벗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존재이고,
두려움 없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