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435)
작가 : 로히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 1399-1464)
크기 : 목판 유채 220 x 262cm
소재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Prado) 미술관
작가는 프랑스와 인접한 벨기에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에서 태어나 수도인 브뤼셀로 이동하면서 자신이 천직으로 여기는 미술 공부에 몰두했고 당시 미술의 대종이었던 성미술 특히 교회 예술에 심취해서 괄목할 만한 성과와 인정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감정 표현에 천재적인 자길을 보이면서 어러 종교화를 통해 신앙의 감성적인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의 수난을 두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착잡한 심정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을 한곳에 모아 수난의 인간적 슬픔을 표현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서의 한곳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 여러 곳에서 자신을 드러내던 사람이었고 신분도 각층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움으로서 많은 이질적인 것을 어색하지 않게 조화시키는 대단한 자질을 보였다.
이처럼 그는 인간성의 표현을 잘 하는 작가로서 여러 인물들을 한곳에 모았으나 이들이 느끼는 공통 분모인 슬픔에 대한 공감대의 형성으로 이것을 더 정확히 표현했다.
또한 성서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한곳에 모음으로서 이것을 보는 관람자들에게 이 사건의 의미가 바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는 것 같은 현장감을 키워주는데도 큰 역할을 해서 조금도 산만함을 느낌이 없이 주님 수난으로 말려 들어가게 만들었다.
과거 성미술에선 이런 표현은 하지 않았고 해서는 않되는 것으로 여겼다. 하느님은 세상의 창조주시며,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분이시기에 자신의 모습을 인간적인 감정에 표현에 묶어두지 않았고 가장 큰 십자가의 고통 역시 너무도 덥덥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당시 하느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에서는 초월적 존재로 여겼기에 예수님도 고통에서 초연한 존재로 여겨지다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탁발 수도자들의 등장하면서 성모님까지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지극한 고통을 느끼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여기 등장하는 여성들은 성서의 다음 구절로 나타나는 예수님 주위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도우던 여성 사도들이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8,2-3)
이 작품에는 예수님의 삶에서 감동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았던 2명의 성인을 연상시키는데, 구도자의 모습으로 메시아를 찾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새인생을 걷기 시작한 니코데모와 예수님의 수난 마지막을 도와 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처럼 니코데모는 메시아를 찾다가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제자가 되었던 구도자의 모델이었다. 예수님의 수난 후 십자가를 지키다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시신을 내려서 자기가 묻히기 위해 준비해둔 무덤에 예수님을 모신 아리마태아 요셉이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요한 19,38-40)
작가는 작품에서 이 둘을 등장시켜 그리스도 제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니코데모는 하느님을 찾고 있던 구도자였고 아리마태아 요셉은 당시 인품으로나 재력으로나 상당한 위치에 있던 사람으로 신분은 전혀 다르나 예수님에 대한 열정으로 서로 어울리는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 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작업을 하는 젊은이는 아리마태아 요셉의 하인이고 아리마태아 요셉 곁에 서있는 사람은 그의 동료이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검박한 모습의 남자는 니코데모이고 화려한 옷을 입은 이는 아리마태아 요셉이다.

아리마태아 요셉 곁에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여성은 마리아 막달래나이다. 그는 성서에서 일곱 미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심한 정신적 갈등 상태에 있다가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된 인간의 모델이다. 과거 교회는 어떤 때 성서에 나오는 죄많은 여인들에 대한 것을 전부 모아 막달래나를 창녀 였던 여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현대에 와선 이것이 잘못된 것이고 성녀는 항상 예수님을 따르며 뒷바라지 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예수님의 열세번째 제자로 칭송되고 있다.
그가 입은 흰색의 옷과 팔에 걸친 붉은 색은 그의 주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왼쪽엔 울고 있는 두명의 여자는 요안나와 수산나이며 붉은 옷의 젊은이는 성모님을 자기 어머니로 모셨던 사도 요한과 성모님이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너무 상처받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인연의 삶을 살았던 인간을 등장시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이것이 아무 문제도 없으나 당시에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교회 신학이 하느님의 신성을 극대화한 과정에서 신에 대한 모든 표현은 인간적인 감성의 표현을 모두 제한하는 것으로 여겨 십자가에 달려 수난하신 예수님의 모습 조차 슬픔과 고통과는 거리가 먼 그런 모습인 것이 정상이었을 시기였기에 이 작품의 감성 표현은 너무 생소한 표현이기 이전에 신앙의 진면모를 손상시키는 것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같은 탁발 수도자들과 이런 작가의 노력에 의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모습이 설득력 있는 감성적 존재로 부각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신학의 발전 경지로 볼 수 있다.
오늘도 우리 교회 신학은 신과 인간이라는 저울에 신의 모습이 더 비중을 두는 것은 고쳐야 할 모습이다. 인간 예수의 모습을 더 부각시켜야 하고 이런 관점에서 작가는 교회가 변해야 할 모습의 표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