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아버지의 뜻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와의 우정은 사랑의 순종으로 깊어집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두려움에서 나온 굴복이 아니었습니다. 성부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온 자유로운 자기 내어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자유를 아버지의 뜻에 내어드렸고, 그 사랑의 순종은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그분 곁에서 위로를 받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택하신 사랑의 방식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을 저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내려가신 곳으로 저도 내려가겠습니다. 당신이 용서하신 사람을 저도 용서하겠습니다. 당신이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저도 저 자신을 내어놓겠습니다.”라는 삶의 응답이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완성해갑니다.
여기에서 순종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순종은 자신의 생각과 인격을 없애는 일이 아니며 누군가의 부당함이나 폭력을 무조건 감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순종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순종이고, 때로는 말하는 것이 순종이며, 때로는 기다리는 것이 순종이고, 때로는 사랑 안에서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순종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이 관계 안에서 아버지의 뜻, 곧 진실과 사랑과 생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찾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검증되는 가장 현실적인 장소가 됩니다. 우리는 성당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를 오해하는 형제 앞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성체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를 비판하는 사람 앞에서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듣는 것은 어렵습니다. 십자가에 입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약함을 품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야말로 관상이 삶으로 내려오는 자리이며, 기도가 육화되는 자리입니다.
특히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누군가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내가 한 일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공동체 안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면 사랑은 거래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 내가 너를 배려했으니 너도 나를 배려해야 한다.”라는 보이지 않는 계약서를 마음속에 쓰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가장 큰 사랑을 베푸시면서도 인정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에게는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가, 칭찬받지 않아도 선을 계속할 수 있는가,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 안의 인정 욕구가 조금씩 죽고 그리스도의 자유가 태어납니다.
다른 사람이 빛날 때 기뻐하는 것도 같은 십자가입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다른 사람이 더 잘하고, 내가 받고 싶었던 인정을 다른 사람이 받으며, 내가 오래 수고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감사와 칭찬이 돌아갈 때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비교는 형제를 경쟁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형제성은 다른 사람의 선을 자신의 선처럼 기뻐하는 자유를 요구합니다. “저 사람이 빛나도 괜찮다. 내가 주목받지 않아도 괜찮다.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하든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자기중심성이 조금 죽고 형제성이 태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는 것도 관계 안의 중요한 작은 순교입니다. 공동체의 갈등에서 우리는 흔히 “누가 옳은가?”를 묻습니다. 물론 진실은 중요하며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친구에게는 그보다 한 가지 질문이 더 필요합니다. “나는 이 진실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진실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진실을 무기로 사용하여 상대를 꺾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틀린 말을 했는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려 하는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인가,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인가? 어떻게 말해야 진실과 사랑이 함께 살아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옳으면서도 사과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던 내용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말을 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아프게 한 것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옳음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유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틀렸기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옳으셨지만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승리인가, 아니면 생명인가?”라고 묻습니다.
통제의 욕망 역시 관계 안에서 죽어야 할 중요한 거짓 자아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를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저 형제는 바뀌어야 한다. 내 말을 좀 들어야 한다.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고 도움을 주어야 하지만, 사랑과 통제는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통제는 상대가 내 기대에 맞아야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를 허용하셨고, 베드로의 배신도, 유다의 떠남도 강제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붙잡는 능력만이 아니라 놓아주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순종은 “주님, 저 사람을 제 방식대로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제가 해야 할 사랑은 하되 그 사람의 변화와 미래는 당신께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시도록 허용하는 가난입니다.
서운함 역시 우리의 숨은 욕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거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가. 적어도 이 정도는 알아줄 줄 알았다.”라는 마음 속에는 우리가 상대에게 기대했던 것이 숨어 있습니다. 서운함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내가 사랑 뒤에 어떤 보이지 않는 청구서를 붙여놓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운함이 찾아올 때 “나는 무엇을 기대했기에 이렇게 아픈가?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면 서운함조차 자기 인식과 자유의 길이 됩니다.
용서는 이 관계성의 가장 깊은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상처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아니며 부당한 행동을 선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상처가 내 삶의 마지막 말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한 일이 내 미래와 내 사랑의 능력을 결정하게 두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용서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