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산길 5
-하느님의 섬세함을 관상하며-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29).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일일이 다 세어 두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그 섬세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섬세함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그 증거 중 하나는 우리 몸 가운데 생생하게 실재하는 성의 감미로움입니다.
라틴어 "수아비스"(suavis) 형용사는 부드럽다는 뜻과 감미롭다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우리 말로는 한 단어로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드러운 감미로움으로 이해합니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그가 남겨 놓은, 많지 않은 글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몇 번 사용했습니다.
사실, 성의 부드러운 감미로움 속에는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의 신비가 더할 나위 없이 실증적으로 현존합니다. 놀랍고 경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성의 오르가슴을 체험하면 누구나 황홀한 감미로움을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지요.
너무도 황홀하고 행복한 감미로움,
너무도 감미롭고 향기로운 황홀함,
감미로움의 극치,
황홀함의 극치!
이렇게 중언부언하면 공감이 좀 될런지요?
성의 오르가슴이 안겨주는 이 강렬한 행복의 극치감은, 느끼는 누구에게나 댓가를 지불함없이 무료로 거저 주어집니다. 창조 질서 안에 현존하는 자연의 섭리겠지요.
왜, 어찌하여 자연 안에 그런 섭리가 현존하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느끼도록 창조하신 그분의 뜻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카톨릭 교회의 “성사”(聖事)는 그리스 말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라 하고 라틴 말로는 “사크라멘툼”(sacramentum)이라고 합니다. 두 낱말 모두 “신비”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전통적으로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표지”라는 관점에서 조명되어 왔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주는 표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인 성사, 즉 혼인의 신비와 관련하여 참으로 놀라운 것은 로마 교회법 제1061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는 혼인의 개념입니다: “영세자들 사이의 유효한 혼인이 완결되지 않았으면 그저 성립된 혼인이라고 일컫는다. 혼인이 그 본성상 지향하고 또한 부부가 한 몸이 되어 그 자체로 자녀 출산에 적합한 부부 행위를 부부가 서로 인간적 방식으로 행하였으면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이라고 일컫는다”.
이 교회법 조항에는 카톨릭 교회에서 혼인의 신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혼인 신비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심오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위 조항에서 “자녀 출산에 적합한 부부 행위”는 부부간의 성교를 뜻하고, 그러기에 카톨릭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거행된 혼인은 부부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성교를 통하여 완결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법 조항에는 부부간의 성교 행위가 하느님 은총의 표지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현시해 준다는 놀라운 신비 신학적 통찰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신랑 신부의 사랑 어린 성교는 혼인의 신비, 즉 혼인 성사의 핵심에 해당되는 신비적인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평을 바탕으로 성적 오르가슴의 황홀한 감미로움을 다시 조명해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서 신랑 신부가 성적 오르가슴을 체험하는 황홀한 감미로움을 통해 정자와 난자, 즉 생명의 씨앗, 사랑의 씨앗, 신비의 씨앗이 서로 만난다는 사실, 너무도 신비롭지 않나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과 충만한 기쁨 중에 정자 난자가 첫 대면을 하게 되고 그 만남으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는 사실은 오묘함 중의 오묘함, 신비 중의 신비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의 탄생 순간에 신성하고 거룩한 무대로 펼쳐지는 이 황홀한 감미로움은 새로운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하느님의 섬세함이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지를 드라마틱하게 현시해 주는 생생한 증거이구요.
황홀한 감미로움의 무대에 신비롭게 등장하는 두 주인공 정자와 난자를 상상만 해도 저는 신비로움에 젖어들고, 감탄과 경외감이 저절로 솟아오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그러한 섬세한 신비의 열매들이고,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 또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섬세한 신비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몸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상의 나래를 조금 펼쳐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바로 우리 몸 안에 섬세하게 살아 현존합니다.
이 섬세한 신비를 느끼는 것 또한 신비 체험이고, 이 신비를 체험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 관상이 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 10,29).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일일이 다 세어 두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그 섬세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섬세함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말해줍니다.
그 증거 중 하나는 우리 몸 가운데 생생하게 실재하는 성의 감미로움입니다.
라틴어 "수아비스"(suavis) 형용사는 부드럽다는 뜻과 감미롭다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우리 말로는 한 단어로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드러운 감미로움으로 이해합니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그가 남겨 놓은, 많지 않은 글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몇 번 사용했습니다.
사실, 성의 부드러운 감미로움 속에는 하느님의 섬세한 사랑의 신비가 더할 나위 없이 실증적으로 현존합니다. 놀랍고 경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성의 오르가슴을 체험하면 누구나 황홀한 감미로움을 강렬하게 느끼기 때문이지요.
너무도 황홀하고 행복한 감미로움,
너무도 감미롭고 향기로운 황홀함,
감미로움의 극치,
황홀함의 극치!
이렇게 중언부언하면 공감이 좀 될런지요?
성의 오르가슴이 안겨주는 이 강렬한 행복의 극치감은, 느끼는 누구에게나 댓가를 지불함없이 무료로 거저 주어집니다. 창조 질서 안에 현존하는 자연의 섭리겠지요.
왜, 어찌하여 자연 안에 그런 섭리가 현존하는 것일까요?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느끼도록 창조하신 그분의 뜻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카톨릭 교회의 “성사”(聖事)는 그리스 말로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라 하고 라틴 말로는 “사크라멘툼”(sacramentum)이라고 합니다. 두 낱말 모두 “신비”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전통적으로 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표지”라는 관점에서 조명되어 왔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주는 표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인 성사, 즉 혼인의 신비와 관련하여 참으로 놀라운 것은 로마 교회법 제1061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는 혼인의 개념입니다: “영세자들 사이의 유효한 혼인이 완결되지 않았으면 그저 성립된 혼인이라고 일컫는다. 혼인이 그 본성상 지향하고 또한 부부가 한 몸이 되어 그 자체로 자녀 출산에 적합한 부부 행위를 부부가 서로 인간적 방식으로 행하였으면 성립되고 완결된 혼인이라고 일컫는다”.
이 교회법 조항에는 카톨릭 교회에서 혼인의 신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혼인 신비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심오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위 조항에서 “자녀 출산에 적합한 부부 행위”는 부부간의 성교를 뜻하고, 그러기에 카톨릭 교회에서 합법적으로 거행된 혼인은 부부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성교를 통하여 완결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교회법 조항에는 부부간의 성교 행위가 하느님 은총의 표지로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를 현시해 준다는 놀라운 신비 신학적 통찰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신랑 신부의 사랑 어린 성교는 혼인의 신비, 즉 혼인 성사의 핵심에 해당되는 신비적인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평을 바탕으로 성적 오르가슴의 황홀한 감미로움을 다시 조명해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서 신랑 신부가 성적 오르가슴을 체험하는 황홀한 감미로움을 통해 정자와 난자, 즉 생명의 씨앗, 사랑의 씨앗, 신비의 씨앗이 서로 만난다는 사실, 너무도 신비롭지 않나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과 충만한 기쁨 중에 정자 난자가 첫 대면을 하게 되고 그 만남으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는 사실은 오묘함 중의 오묘함, 신비 중의 신비 아닐까 싶습니다.
생명의 탄생 순간에 신성하고 거룩한 무대로 펼쳐지는 이 황홀한 감미로움은 새로운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하느님의 섬세함이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지를 드라마틱하게 현시해 주는 생생한 증거이구요.
황홀한 감미로움의 무대에 신비롭게 등장하는 두 주인공 정자와 난자를 상상만 해도 저는 신비로움에 젖어들고, 감탄과 경외감이 저절로 솟아오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그러한 섬세한 신비의 열매들이고,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 또한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하느님의 섬세한 신비의 선물들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그 무엇보다 우리의 몸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상상의 나래를 조금 펼쳐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바로 우리 몸 안에 섬세하게 살아 현존합니다.
이 섬세한 신비를 느끼는 것 또한 신비 체험이고, 이 신비를 체험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 관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