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7,36-50
한 식탁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한 주인 ‘바리사이 시몬’과, 초대받지 않은 ‘죄 많은 여인’입니다.
여인은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 맞추며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 발랐습니다.
반면 시몬은 속으로 계산합니다.
‘저 여자가 죄인인 줄 예수가 안다면 손도 못 대게 할 텐데.’
여기서 두 사람의 ‘셈법’이 갈립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입맞춤도, 기름도 ‘아꼈습니다’.
기본 예의조차 ‘계산하며’ 인색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여인의 ‘낭비’를 못마땅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드십니다.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두 사람,
둘 다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도 압니다.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이 말씀의 순서를 잘 새겨야 합니다.
여인이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많이 용서받았기에’ 큰 사랑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사는 값이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에서 넘쳐흐르는 ‘열매이자 표징’입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언제나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비와 나눔을 누구보다 힘주어 설교한 교부입니다.
그는 이런 ‘아낌없는 사랑’을 늘 기렸습니다.
여인은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본디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까운 향유’라 하지만, 하늘은 ‘아름다운 사랑’이라 합니다.
인색하게 계산한 시몬은 적게 사랑했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큰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아낌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이 주간의 심장을 보여 줍니다.
참된 아낌은 ‘시몬의 계산과 인색함’이 아닙니다.
여인은 ‘사랑’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고,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물과 전기와 소비는 검소히 아끼되,
사랑과 자비와 눈물만은 ‘옥합처럼’ 아낌없이 쏟으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셨고(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 복음),
성모님도 당신을 아끼지 않으셨듯(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복음),
오늘 여인도 향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코헬렛의 마지막 장이 이와 겹칩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권합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2,1).
여인은 ‘지금’ 왔습니다. 미루지 않았습니다.
사랑도, 회개도, 미루면 낭비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시몬처럼 사랑마저 ‘계산하고 아끼지’ 않는가?
나는 ‘먼저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사랑을 흘려보내는가?
나는 사랑과 자비를 ‘옥합처럼’ 아낌없이 쏟는가?
나는 사랑과 회개를 ‘지금’ 하는가, 미루는가?
주님,
사랑마저 계산하는 인색함을 거두어 주소서.
먼저 받은 큰 용서를 기억하며,
향유처럼 사랑을 아낌없이 쏟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