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에서 배우는 사랑의 순종
성모님의 통고와 예수님의 수난, 그리고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성모님의 통고와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바라보면,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과 죽음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순종을 통하여 완성되고, 그 사랑으로 새로운 관계가 태어나는 자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본래 불순종하셨다가 순종하게 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의 조건 안으로 들어오셨고, 인간이 겪는 두려움과 고통과 죽음까지 받아들이시면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의 순종을 몸으로 끝까지 살아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순종은 고통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두려움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시면서도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순종은 자기 생각과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가지고서도 자신보다 더 크신 사랑에 자신을 내어맡기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셨는가만이 아닙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반당하면서도 사랑하셨고, 버림받으면서도 사랑하셨으며, 조롱과 폭력 속에서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는 자신의 몸과 피와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남은 것까지 선물로 바꾸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십자가 아래에 어머니 마리아가 서 계십니다.
시메온이 예언했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골고타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통고는 단순히 아들을 잃는 어머니의 슬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드님의 자기 내어줌에 어머니가 함께 참여하는 사랑의 고통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고 전합니다. 이 짧은 표현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말은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할 수도 없고,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곁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가장 깊은 사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명하거나 판단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십자가 아래에 함께 서 주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통고는 바로 이러한 현존의 사랑입니다. 나자렛에서 마리아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때의 순종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종이었다면, 골고타의 순종은 자신이 받아들였던 그 말씀을 다시 아버지께 내어드리는 순종입니다. 나자렛에서 아들을 받아들였다면 십자가 아래에서는 그 아들을 놓아드려야 합니다. 여기에 사랑의 가장 깊은 역설이 있습니다.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놓아주는 데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붙잡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내가 사랑하는 공동체와 사람과 일도 내 뜻대로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사랑이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바라보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 고통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주십니다.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시고 제자를 어머니에게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관계가 끝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지만 그 내어줌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십니다. 마리아 역시 아들을 잃는 자리에서 새로운 아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받던 제자도 이제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서로 낯선 사람들이 가족이 됩니다. 여기에서 교회가 태어나고, 여기에서 복음적 형제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말씀은 단순히 요한 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우리 모두에게 들려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사람을 맡기십니다. “이 사람이 네 형제다.” “이 사람이 네 자매다.” “이 사람이 내가 너에게 맡기는 사람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만 형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도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옵니다. 바로 여기에서 순종은 관념이 아니라 관계의 현실이 됩니다.
복음적 순종은 단순히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먼저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형제의 목소리를 듣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들으며,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뜻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순종은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형제의 말을 한 번 더 들어주는 것, 상대를 내 방식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 상처를 받았을 때 즉시 관계를 끊기보다 그 상처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 내 계획이 무너졌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시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고 반드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은 관계를 단절하게 할 수도 있고, 원망하게 할 수도 있으며, 자기 상처 안에 갇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 속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를 선택하는가입니다. 상처 때문에 사람을 밀어낼 것인가, 아니면 그 상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볼 것인가. 고통 때문에 자신을 닫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을 품는 자비의 자리로 내어놓을 것인가. 예수님의 길은 분명합니다. 고난에서 순종으로, 순종에서 자기 내어줌으로, 자기 내어줌에서 새로운 관계로, 그리고 그 관계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모님도 그 길을 함께 걸으셨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드리고, 어머니는 아드님을 내어드리며, 그 두 내어줌 사이에서 사랑받던 제자는 새로운 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철저한 가난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풍요로운 관계의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선물로 바꾸는 자리입니다.
가난은 말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순종은 바로 그 여백을 만드는 것입니다.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그 가난을 살아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 것으로 붙잡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드리며, 그 빈자리에 새로운 아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통고는 단순한 상실의 슬픔이 아닙니다. 사랑이 더 넓어지기 위해 겪는 산고입니다. 한 아들을 잃는 자리에서 수많은 자녀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관계가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온 인류를 품는 모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공동체 생활과 형제적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때때로 형제의 십자가를 없애주려고 합니다. 충고하고 설명하고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마리아처럼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말보다 현존하고, 판단보다 기다리며, 해결보다 동행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사랑도 이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당신 곁을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아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통고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히브리서의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는 말씀과 요한복음의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말씀은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고난은 순종으로, 순종은 자기 내어줌으로, 자기 내어줌은 관계로, 관계는 형제성으로, 형제성은 생명으로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자신을 내어드림으로써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마리아는 아드님을 내어드림으로써 모든 제자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사랑받던 제자는 마리아를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복음적 순종이란 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의 선물로 내어놓는 것이며, 복음적 가난이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내 것이라고 소유하지 않는 것이며, 복음적 형제성이란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는 아들을 잃었지만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더 넓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의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느냐?”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이 사람이 네 형제다.” “이 사람이 네게 맡겨진 사람이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의 고난도 조금씩 순종이 되고, 순종은 자기 내어줌이 되며, 자기 내어줌은 새로운 관계를 낳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도 조금씩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고난에 갇히지 않고,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상처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 어쩌면 그것이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과 함께 배우는 가장 깊은 순종이며,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열어 주신 사랑의 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