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세례자 요한의 축일은
다른 성인들의 축일과 다른 점이 있고 축일 이름도 다릅니다.
다른 성인들은 태어난 축일이 아니라 다 죽은 날 곧 천상 탄일이 축일입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와 바오로도 이 세상 태어난 날을 축일로 지내지 않고,
순교한 날을 천상에서 태어난 날로 기리며 축일로 지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만 예외적으로 탄생 축일과 죽음 축일을
지내는데 이는 두 분이 인간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
주님의 탄생과 죽음을 온전히 같이하신 분들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와 감사송 모두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선구자로서
탄생과 죽음을 같이하셨음을 이렇게 칭송합니다.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그러므로 오늘 축일의 의미도 여기에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지 않았다면
세례자 요한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하면
안 되고 주님 때문에 죽었다고 얘기해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누구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지만
누구 땜에 내 삶이 이렇게 되었다거나 죽게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인들도 이런 면에서 위대한 사람과 마찬가지이지만
누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이 차이점이고
성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성인인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헤로디아의 앙심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죽은 것이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죽임당한 것이 아니라 순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 14장 8절에서 가르친 바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든,
또 겉모양이 어떠하든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기도는 이제 진리와 정의를 살다가 죽은
세례자 요한을 우리가 본받아야 함도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거대 권력의 거대한 악에 맞서
진리와 정의를 증거 하는 위대한 증거자는 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기도처럼 하느님의 진리를 끝까지 믿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하느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우리가 하지 못한다고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성가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늘의 태양은 못 돼도, 밤하늘 달은 못 돼도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작은 등불 되리라.”
그러므로 하느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정의의 실천이고
우리가 우리 나름으로 해야 할 증언임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