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백과 삶 사이에서 바라보는 우리 믿음의 현주소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믿음의 현주소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는 질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던지신 질문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아직 그 고백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간격이 오늘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는 말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신앙고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뒤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말씀하시자 그분을 붙들고 반박합니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믿음의 현주소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알고 있지만,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르는 데에는 주저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내 삶의 결정권까지 그분께 내어드리기는 어렵고, 십자가를 바라보지만 내가 십자가의 사람이 되는 것은 두려우며, 사랑을 말하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데에는 멈칫하고, 용서를 청하면서도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 앞에서는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예수님을 모르는 데 있지 않고,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고 성경을 알고 기도를 알고 전례를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는 나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입니다.
이 질문에는 관계가 들어 있습니다. “나는 너에게 누구냐?” 그러므로 신앙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깊어지는 일이며, 그 관계가 마침내 나의 선택과 관계와 삶의 방식으로 육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첫 번째 현주소는 어쩌면 ‘고백은 있지만 굴복은 부족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내가 원하는 방식, 내가 세워 놓은 계획과 기준을 붙들고 하느님께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 뜻에 하느님의 서명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이 참된 제자도의 길로 들어가려면 결국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통과해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결국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의 진실은 “그러므로 제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삶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믿음의 두 번째 현주소는 ‘믿지만 맡기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일이 생기면 금세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합니다. 사람을 통제하고 상황을 통제하고 미래를 통제하며, 심지어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까지 정해 놓으려 합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그분께 나를 맡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확실성을 많이 가진 상태라기보다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뢰하는 능력이며, 모든 답을 가진 상태라기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그분의 손을 놓지 않는 관계입니다.
우리 믿음의 세 번째 현주소는 ‘사랑받지만 그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위로받고 싶고 용서받고 싶으며 축복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랑은 나에게 도착하여 멈추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흘러갑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서 다시 형제와 자매와 피조물에게 흘러갑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은 결국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검증됩니다.
내가 나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를 불편하게 하는 형제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표정을 짓는가,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도 그의 존엄을 지켜 줄 수 있는가. 그곳이 신앙의 현장입니다. 특별히 프란치스칸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은 더욱 구체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라는 질문에 신학적 문장만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대답으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하셨기에 내려놓았고,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기에 작은 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형제가 되셨기에 모든 이를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였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기에 자신도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에게 신앙고백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우리의 믿음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아직 길 위에 있는 사람임을 압니다. 아직 사랑해야 하고, 아직 용서해야 하며, 아직 내려놓아야 하고, 아직 작아져야 하며, 아직 배워야 하는 사람임을 압니다. 그래서 성숙한 믿음은 “나는 안다”에서 “주님, 가르쳐 주십시오”로 내려갑니다.
“나는 옳습니다”에서 “주님,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로 내려가고, “저 사람을 바꾸어 주십시오”에서 “주님, 제가 먼저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로 내려가며,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에서 “주님, 저를 어디에 내어드릴까요?”로 내려갑니다. 바로 이것이 내적 가난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교회와 수도생활과 우리 각자의 신앙에 가장 필요한 것도 이것인지 모릅니다. 신앙을 더 많이 설명하는 것보다 신앙이 보이게 하는 것, 사랑을 더 많이 말하는 것보다 사랑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형제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내 앞의 한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 가난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내 것을 내려놓아 다른 사람이 살아날 공간을 만드는 것, 겸손을 설명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빛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이렇게 들려옵니다.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나는 대답합니다. “주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다시 물으시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너의 삶에서 내가 정말 살아 있느냐?” 너의 말 속에 내가 살아 있느냐. 너의 공동체 안에 내가 살아 있느냐. 너의 용서 속에 내가 살아 있느냐. 너의 가난 속에 내가 살아 있느냐. 너의 자유 속에 내가 살아 있느냐. 너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 속에 내가 살아 있느냐.
결국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성당 안에서 얼마나 경건한가만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관계의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살아 계시는가, 그것이 더 깊은 척도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누구라고 고백해야 합니까?”가 아니라,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아야 제 삶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하게 되겠습니까?” 그 질문을 품는 순간 신앙고백은 입술에서 삶으로 내려옵니다. 고백은 순종이 되고, 순종은 내어맡김이 되며, 내어맡김은 가난이 되고, 가난은 다른 이를 받아들일 여백이 되고, 그 여백에서 형제성이 태어나며,
형제성 안에서 사랑은 육화되고, 마침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내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믿음의 자리이며, 고백에서 제자도로, 앎에서 따름으로, 소유에서 내어줌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 믿음의 새로운 현주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