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비유에 이름을 붙인다면 두 가지일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후한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는 마치 루카복음 15장의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도 하고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개념 정리를 해 봤습니다.
주인의 포도밭: 하느님 공동체
포도밭 일꾼들: 공동체 구성원
품삯과 품삯 계산: 종말의 상급(구원)
그러니까 주님의 포도밭에 시간 차이가 나게 가서 일꾼들이 일한다는 것은
하느님 공동체에 일찍 속하는 사람과 나중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품삯이 같다는 것은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같은 상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공정(公正)은 세상의 공정과 아주 다릅니다.
세상의 공정은 자기가 일한 만큼이고 능력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의 부(富) 증대에 얼마나 기여했냐 그것에 따라서
상급을 많이 주거나 조금 주는 것이 이 세상의 공정인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주인이 일을 시키는 것의 목적이
주인의 부 증대가 목적이 아니라 일꾼의 행복이 목적이고,
또 일꾼 모두가 행복한 것이 목적이기에 공정도 다릅니다.
쉽게 얘기하면 회사의 부의 증대가 아니라
직원들의 복지 증대가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의 이름은 ‘후한 주인의 비유’라고 함이 맞고
그래서 오늘 비유도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친구여,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악덕기업가가 아니고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분이며,
일찍 오면 일찍 행복하고 늦게 오면 늦게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분인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후하심을 모르고 인간은 경쟁하고 욕심부립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아니, 나만 살기 위해서는
지붕에 올라간 뒤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도 세상살이에 경쟁이 심하다 보니
하느님 나라 구원에 있어서도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먼저 세례받고 사는 동안 하느님 계명 지키기 위해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 실컷 죄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세례받고
구원받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심지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먼저 세례받고 하느님 계명 지키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고,
그러는 것이 먼저 행복한 것임을 모르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세례받은 것이 억울한 사람입니까?
먼저 세례받은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입니까?
누구든 늦게라도 세례받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