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하느님의 선은 나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게도 고유한 은사가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모든 일을 통제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공동체는 한 사람의 완전함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은사들이 관계 안에서 흘러갈 때 세워집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돌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않고, 가장 아래에 놓인 돌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가장 위에 놓인 돌은 혼자 지붕을 받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모든 돌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의 무게를 받아 줍니다. 어떤 돌은 문을 이루고, 어떤 돌은 벽이 되며, 어떤 돌은 제단의 받침이 됩니다. 모든 돌의 모양이 같지 않지만 서로의 차이 때문에 작은 성당은 더 단단하게 서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벽 전체가 흔들리듯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 적은 형제도 공동체의 한 돌입니다. 몸이 아픈 형제도 공동체를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일을 빨리 하지 못하는 형제도,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형제도, 실수를 반복하여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는 형제도 하느님께서 포르치운쿨라 안에 놓으신 하나의 돌입니다. 우리는 능력과 효율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쉽습니다.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다른 이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형제성에서 사람의 존엄은 유용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제도 존재 자체로 공동체를 가르칩니다. 병들고 늙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제는 우리의 속도를 늦추고, 효율보다 돌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며, 사람이 무엇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복음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런 형제를 부담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아직 형제성을 모릅니다. 형제를 그의 기능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이미 한 인격이 아니라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도구는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지만, 형제는 약해질수록 더 깊이 품어야 할 선물입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형제를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사람, 나의 계획을 도와주는 사람, 나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고유한 이름과 얼굴과 역사를 지닌 존재입니다. 참된 사랑은 형제를 내 안으로 삼켜 나와 같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가 그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공간을 내어줍니다.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고, 그의 길이 내가 기대한 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그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방식이 나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한 사람의 상처와 침묵과 행동의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곁에 머무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떠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어도 그의 신비를 존중하며,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형제를 해석합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단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해석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판단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우리의 판단보다 깊고, 그의 삶은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사건보다 넓으며,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이루시는 일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형제성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입니다. 판단을 멈추고 묻는 것이며, 충고하기 전에 듣는 것이고, 상대방의 말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이 내 마음 안에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제가 아픔을 말할 때 너무 빨리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 서둘러 위로하고, 그의 혼란을 빨리 끝내 주고 싶어 충고하며, 침묵이 불편해 말을 채웁니다. 그러나 때로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사람입니다.
형제의 상처 앞에서 말없이 곁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고통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고,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의 곁에서 같이 기다리며, 그의 아픔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 형제성입니다. 형제성은 타인의 속도에 나의 걸음을 맞추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빠른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늦은 사람에게 서두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약한 사람의 속도에 공동체가 자신을 맞추도록 부릅니다. 한 사람이 뒤처졌을 때 그를 남겨두고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공동체는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형제적이지는 않습니다.
형제는 함께 도착해야 합니다. 병든 형제가 천천히 걸으면 우리도 천천히 걸어야 하고,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형제가 있다면 그의 시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늦어질 수 있고, 일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을 잃으면서 이루는 성공은 복음의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일보다 먼저 바라보셨습니다. 율법의 완성보다 상처 입은 사람의 회복을 먼저 선택하셨고, 군중의 기대보다 길가에 멈춰 선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분에게 한 사람은 결코 전체를 위하여 희생해도 되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의 외적인 모습과 능력과 과거를 넘어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의 허물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선을 믿고, 그의 실패가 그의 마지막 이름이 되지 않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할 수 있지만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셨듯이 우리도 형제의 성장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잘못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을 그 잘못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존재까지 부정하지 않고, 책임을 묻되 존엄을 빼앗지 않으며,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가볍게 여기거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그 잘못이 우리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미래가 있음을 믿고, 죄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자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전대사의 정신은 바로 이 자비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돌아오기에 너무 늦은 사람이 없고,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인이 없으며,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깊이 무너진 인생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눌려 성당 문밖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랐습니다. 자비는 사람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자비는 잘못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책임을 돌려주는 힘입니다. “너는 네 잘못보다 더 큰 존재이며,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상처 입혔고, 누군가에게 용서받았으며, 지금도 하느님의 인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형제 위에 서서 그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내 눈 속의 들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형제에게는 엄격한 이중 기준, 내 실수는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형제의 실수는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내가 상처를 주었을 때는 이해받기를 원하면서 형제가 나를 아프게 했을 때는 그를 쉽게 정죄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 안의 들보입니다. 들보를 빼낸다는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진실해지는 일입니다. 내 안에도 같은 어둠이 있고, 나 역시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이 있을 때 형제를 향한 우리의 말은 날카로운 판단이 아니라 자비로운 권고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