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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9일 일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Ne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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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나쁜 것인가?
내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이고 무의미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의미한 두려움도 있고 무의미한 두려움이 있는데,
유의미한 두려움은 좋은 두려움이고 무의미한 두려움은 나쁜 두려움이겠습니다.
그리고 무의미한 두려움은 두려움밖에 없고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뭔가 좋은 것을 얻으면 의미가 있는데 얻는 것이 없는 겁니다.
실로 많은 이가 고통밖에 없는 고통을 겪고,
두려움밖에 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데
실로 이런 고통은 너무 고통스럽고 이런 인생은 너무도 불행합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두려움은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벗어날 길이 없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벗어나는 길로 자살을 선택할 텐데
죽으면 더 이상 고통도 두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만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의 길이 되겠지만
이렇게 해결하면 고통과 두려움은 무의미하고 나쁜 고통과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해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와 베드로가 바로 좋은 모범으로서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럼으로써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둘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죽음이었고 그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싸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둘 앞에 죽음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둘이 죽음 앞에 있는 것입니까?
그게 그것 같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많이 다른 겁니다.
내 앞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스스로 사라져 주지 않으면 나는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죽음 앞에 있으면 내가 죽음이 아니라
다른 것 앞으로 자리를 옮겨 있으면 됩니다.
오늘 열왕기에서 엘리야에게 어떤 소리가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불러내실 때 엘리야가 주님 앞에 서면 됩니다.
그는 이세벨의 살해 위험을 피해 주님의 산 호렙에 왔으면서도 굴속에 숨어있는데
이제 더 이상 숨어있지 말고 다시 말해서 거기서 나와 주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두려워도 이 용기는 내야 하고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셨고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하셨으며 바오로 사도는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라고 했지요.
오늘 제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알아뵙지 못하고 주님을 유령으로 만났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풍랑과 사투하다가 혼쭐이 났으면 주님도 유령처럼 보였겠습니까?
이것은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 앞에 서라는 말씀을 듣고 굴에서 나와 섰을 때
강풍과 지진과 불이 연달아 엘리야 앞을 지나갔지만
그것들 안에는 하느님은 아니 계셨다고 열왕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찌 그것들 안에는 아니 계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너무 두려워 그것들 안에서는 하느님을 못 만난 것인데
그런데 실은 그것들이 하느님 체험의 도구들입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이나 엘리야에게 그것들은 자기들 힘의 한계를 체험하게 하고,
다른 의지할 곳도 없는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리게 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더 내가 잘 못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십니다.
아이가 다치는 걸 아이보다 어미가 더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이 다하여 내 힘으로 뭘 어찌하려던 것을 멈추게 될 때,
다시 말해서 나의 몸부림이 잠잠해지고 누군가 구해줄 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마치 그때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그때 ‘짠’하고 나타나실 것이고, 그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실 것입니다.
연중 제19주일-두려움 가운데 짠 하고 나타나시는
두려움은 나쁜 것인가?
내게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이고 무의미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의미한 두려움도 있고 무의미한 두려움이 있는데,
유의미한 두려움은 좋은 두려움이고 무의미한 두려움은 나쁜 두려움이겠습니다.
그리고 무의미한 두려움은 두려움밖에 없고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뭔가 좋은 것을 얻으면 의미가 있는데 얻는 것이 없는 겁니다.
실로 많은 이가 고통밖에 없는 고통을 겪고,
두려움밖에 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데
실로 이런 고통은 너무 고통스럽고 이런 인생은 너무도 불행합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두려움은 벗어날 길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벗어날 길이 없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벗어나는 길로 자살을 선택할 텐데
죽으면 더 이상 고통도 두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만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의 길이 되겠지만
이렇게 해결하면 고통과 두려움은 무의미하고 나쁜 고통과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렇게 해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와 베드로가 바로 좋은 모범으로서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럼으로써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둘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죽음이었고 그들은 극도의 두려움에 싸여있었습니다.
그런데 둘 앞에 죽음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둘이 죽음 앞에 있는 것입니까?
그게 그것 같지만 제 생각에 그것은 많이 다른 겁니다.
내 앞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스스로 사라져 주지 않으면 나는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죽음 앞에 있으면 내가 죽음이 아니라
다른 것 앞으로 자리를 옮겨 있으면 됩니다.
오늘 열왕기에서 엘리야에게 어떤 소리가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렇게 불러내실 때 엘리야가 주님 앞에 서면 됩니다.
그는 이세벨의 살해 위험을 피해 주님의 산 호렙에 왔으면서도 굴속에 숨어있는데
이제 더 이상 숨어있지 말고 다시 말해서 거기서 나와 주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두려워도 이 용기는 내야 하고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셨고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라고 하셨으며 바오로 사도는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라고 했지요.
오늘 제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 알아뵙지 못하고 주님을 유령으로 만났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풍랑과 사투하다가 혼쭐이 났으면 주님도 유령처럼 보였겠습니까?
이것은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 앞에 서라는 말씀을 듣고 굴에서 나와 섰을 때
강풍과 지진과 불이 연달아 엘리야 앞을 지나갔지만
그것들 안에는 하느님은 아니 계셨다고 열왕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어찌 그것들 안에는 아니 계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너무 두려워 그것들 안에서는 하느님을 못 만난 것인데
그런데 실은 그것들이 하느님 체험의 도구들입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이나 엘리야에게 그것들은 자기들 힘의 한계를 체험하게 하고,
다른 의지할 곳도 없는 그들로 하여금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리게 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보다 더 내가 잘 못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십니다.
아이가 다치는 걸 아이보다 어미가 더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이 다하여 내 힘으로 뭘 어찌하려던 것을 멈추게 될 때,
다시 말해서 나의 몸부림이 잠잠해지고 누군가 구해줄 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마치 그때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그때 ‘짠’하고 나타나실 것이고, 그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