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19-27
오빠 라자로를 잃은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마르타의 첫마디는 슬픔과 원망이 섞인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 끝에 그는 곧바로 덧붙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슬픔과 믿음이 한 마음 안에 함께 있습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부활을 깊이 노래한 교부이자,
사랑하던 동생과 벗(대 바실리오)을 먼저 떠나보내며
‘슬픔 속의 부활 희망’을 몸소 살아 낸 사람입니다.
그는 일깨웁니다.
주님께서는 마르타의 슬픔을
값싼 위로의 말로 덮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부활은 먼 훗날의 ‘사건’이기에 앞서,
지금 내 앞에 계신 ‘한 분’이십니다.
마르타는 처음에
부활을 ‘마지막 날의 일’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대화하는 동안
그 믿음이 자라,
마침내 베드로의 고백에 버금가는 신앙을 바칩니다.
“주님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슬픔으로 시작된 만남이
깊은 신앙 고백으로 영글었습니다.
영성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 복음은 ‘슬픔을 다루는 영성’을 가르칩니다.
믿음은 슬픔을 없애 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믿음은 슬픔을 안고 주님께 나아가,
그 한가운데에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을 만나
희망으로 건너가는 길입니다.
마르타처럼,
우리도 슬픔을 솔직히 아뢰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슬픔과 원망을 주님께 솔직히 아뢰는가?
나는 부활을 ‘먼 훗날의 일’로만 여기지 않는가?
나는 주님을 ‘지금, 내 앞의 생명’으로 만나는가?
나는 마르타처럼 슬픔 속에서도 믿음을 고백하는가?
주님,
슬픔을 솔직히 당신께 아뢰게 하소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시는 당신을
지금 제 앞의 생명으로 만나게 하시고,
마르타처럼 슬픔 속에서도 믿음을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