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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계절에서 육화와 창조의 계절로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Jul 2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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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계절에서 육화와 창조의 계절로

마음의 가장 깊고도 고요한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던 기억들은 어느 날 문득 언어의 옷을 벗고 우리의 삶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되새기는 회상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존재 안에서 다시 말씀을 입으시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시간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낳으시는 육화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현존이며, 사랑이 우리 존재 안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하는 은총의 계절입니다.

 

은은한 달빛조차 다 비추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침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오래전 누군가가 건네준 따뜻한 손길이 살아 있고, 끝내 말하지 못했던 사랑이 살아 있으며, 견디어 낸 눈물이 살아 있고, 용서받았던 순간이 살아 있습니다. 그 모든 기억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명의 씨앗이 되어 오늘도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 심어 놓으신 생명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고 더 깊은 존재의 뿌리가 됩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멀리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끝없이 낳으시고, 성자는 자신을 온전히 성부께 내어드리며, 성령께서는 그 사랑의 숨결로 모든 존재를 생명 안으로 이끄시는 영원한 관계의 신비로 살아 계셨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로를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관계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육화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구원의 계획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하느님의 영원한 존재 방식이 세상 안에서 드러난 사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교리적 선언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기쁨을 당신의 기쁨으로 품으시고, 인간의 슬픔을 당신의 눈물로 흘리시며, 인간의 상처를 당신 몸에 새기시고, 인간의 죽음 속까지 걸어 들어오셔서 생명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인간을 멀리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시는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그 사랑은 베들레헴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현재형입니다.

 

기억이 거룩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받았던 기억은 다시 사랑할 힘이 되고, 기다려 주었던 기억은 다시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되며, 용서받았던 기억은 다시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과거의 은총은 오늘의 사랑으로 육화되고, 오늘의 사랑은 또 다른 내일의 희망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된 글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랑받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몸을 입고 세상을 걸어갑니다.

 

그래서 시보다 아름다운 것은 끝내 말이 되지 못한 사랑입니다. 달빛보다 부드러운 것은 기억 속에서 익어 온 자비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따뜻한 시선, 붙잡지 않아도 오래 남는 사랑,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의 향기, 그것이 바로 육화된 말씀의 언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화려한 기적보다 사람의 삶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 하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 하나, 아무도 모르게 흘린 눈물 하나, 묵묵히 내어준 손길 하나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 신비를 가장 깊이 알아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높은 하늘의 영광보다 낮은 마구간의 겸손을 더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가장 작은 아기가 되셨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선택하였습니다. 더 작은 사람이 되고, 더 가난한 사람이 되며, 더 낮은 자리에서 모든 존재를 형제자매로 부르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육화를 바라본 사람은 더 이상 높아질 이유를 찾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또 하나의 베들레헴이 됩니다. 마리아의 태 안에서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듯이, 오늘 우리의 마음도 말씀이 쉬어 가는 집이 됩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교리를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내 시선이 되고, 내 손길이 되고, 내 기다림이 되고, 내 용서가 되고, 내 사랑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이 말하는 모성적 신비주의입니다. 모든 신자는 말씀을 품고 세상에 낳는 영적인 어머니가 됩니다.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형제애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으며, 가난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고, 피조물을 사랑하는 눈길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삼위일체의 끝없는 내어줌은 우리 안에서 다시 사랑으로 태어나고, 그 사랑은 또 다른 생명을 일으키며 세상을 조금씩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계절은 저마다의 빛깔을 남기며 지나갑니다. 봄은 희망을, 여름은 열정을, 가을은 성숙을, 겨울은 기다림을 우리 안에 새겨 놓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절은 결국 하나의 계절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기억의 계절그리고 말씀이 다시 사람이 되시는 육화의 계절입니다.

 

오늘도 내 마음속에는 그 계절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떠난 사람들의 미소와, 말없이 건네받은 사랑과, 함께 울고 웃었던 형제들의 얼굴과, 나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던 하느님의 자비가 하나의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 강물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주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게 하며, 내 존재가 또 하나의 복음이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마도 이것이 육화의 가장 깊은 신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새로운 베들레헴을 찾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머물 수 있는 가난한 마음 하나, 당신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는 열린 관계 하나, 당신의 자비가 세상을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 하나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사람 안에서 오늘도 영원한 말씀이 다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가슴속을 거니는 기억의 계절은 단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계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어 가는 육화의 계절이며, 삼위일체의 사랑이 관계 안에서 끝없이 생명을 낳는 창조의 계절입니다. 그 계절을 살아가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고, 생명이 머무는 집이 되며, 형제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품고, 피조물의 노래를 자신의 찬미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의 복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그 사람을 통하여 다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사랑은 다시 삶이 되고, 삶은 다시 기도가 되며, 기도는 다시 관계가 되고, 관계는 다시 그리스도를 낳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이며, 육화의 가장 찬란한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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