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5. 십자가 두 갈망이 하나되는 자리
세상은 십자가를 실패의 표지라고 말합니다. 힘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자리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들은 십자가를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자리였으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가장 충만하게 피어난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한 마지막 지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끝내 포기하지 않으신 첫 번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영원한 표지가 되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라 베르나 산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하나의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길은 높은 사상이나 깊은 지식이나 신비로운 체험을 통하여 열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들어갈 때 열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해보다 갈망을 찾으라고 하였고, 빛보다 불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서는 설명보다 사랑이 먼저이고, 논리보다 불타는 마음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시며,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갈망이 가장 깊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등을 돌렸지만 하느님은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문을 닫았지만 하느님은 그 닫힌 문 앞에서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외아드님 안에서 그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문이 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이 인간에게로 건너오기 위하여 놓은 다리이며, 하느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절망 속까지 내려오신 사랑의 계단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입맞추시려고 고개를 숙이셨고, 안아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셨으며,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두 손을 펴셨고, 우리를 당신 안으로 받아들이시려고 옆구리를 열어 놓으셨다고. 이 얼마나 놀라운 시선입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십자가를 고통의 상징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그 상처 안에서 사랑의 몸짓을 보았습니다. 못 박힌 손은 심판의 손이 아니라 포옹의 손이었고, 찢긴 옆구리는 죽음의 상처가 아니라 생명이 흘러나오는 샘이었습니다. 숙여진 머리는 절망이 아니라 입맞춤을 기다리는 사랑의 몸짓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마지막까지 펼치신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성녀 글라라도 같은 신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편지를 보내며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가난한 생활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끝까지 비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습니다. 필리피서가 말하는 케노시스, 곧 자신을 비우시는 그리스도의 길은 프란치스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사랑은 채우는 능력이 아니라 비우는 능력이며, 붙잡는 힘이 아니라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영원부터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이셨듯이, 육화하신 말씀도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내어주심으로 성부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으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랑을 소유하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상대를 바꾸려 하지만 십자가는 사랑은 상대를 기다려 주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문을 열어 두고 기다립니다. 끝까지 믿어 줍니다. 끝까지 희망합니다. 이것이 바오로가 말한 사랑이며,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평생 배우고 살고자 했던 복음의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십자가를 사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사랑을 보았고, 자신의 나약함보다 더 깊은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자유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사람을 자유롭게 합니다.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믿음은 사람을 방어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더 이상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되고, 비교하지 않아도 되며,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바꾸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벌이 무서워 선하게 사는 사람은 처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다시 자기 욕망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달라집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먼저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혁명적인 진실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사랑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갈망은 마침내 하나가 됩니다. 사랑받고 싶었던 갈망은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용서받고 싶었던 갈망은 이미 용서가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던 갈망은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만나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내려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만남은 두 개의 길이 서로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인간의 갈망이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과 하느님의 사랑이 땅으로 내려오는 길이 십자가에서 하나가 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거리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상실이 아니라 가장 깊은 충만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오래 머문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는 더 이상 고통만 보지 않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보며, 상처만 보지 않고 그 상처를 통하여 흘러나오는 은총을 보며, 눈물만 보지 않고 그 눈물이 적시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은 오늘도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병든 이들의 신음 속에서,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끝내 품으려는 마음 안에서, 자신의 이익보다 형제의 생명을 먼저 선택하는 작은 결단 안에서, 십자가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갈망은 언제나 십자가를 지나갑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는 갈망은 아직 자기 자신을 향한 욕망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난 갈망은 반드시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비우면서도 더욱 충만해지고, 자신을 내어주면서도 더욱 풍요로워지며, 자신을 낮추면서도 더욱 하느님을 닮아 갑니다. 마침내 그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계신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인간의 갈망은 하느님의 갈망 안에서 안식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