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4. 당신도 나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오래도록 자신만이 하느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광야를 지나며 기도하는 것도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라 여기고, 눈물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내가 먼저 하느님을 향하여 손을 뻗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나를 찾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셨으며, 내가 그분을 갈망하기 전에 이미 그분께서 나를 당신의 품 안으로 갈망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사실 하느님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며, 우리의 모든 눈물은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던 하느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아본 영혼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 마음 안에 그리움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감정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당신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지으실 때 함께 심어 놓으신 생명의 기억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목소리를 본능적으로 알아듣듯이, 영혼은 창조주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기억은 세상의 소음 속에 묻히고 욕망의 먼지에 덮여 희미해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앞에서 멈춰 서고, 이유 없는 눈물 앞에서 침묵하며, 문득 하늘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고향을 향한 영혼의 기억이며,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불러오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만나실 때 자주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께서 굳이 물으신 이유는 사랑은 언제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억지로 열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사랑은 손을 내밀지만 강제로 붙잡지 않습니다. 사랑은 부르지만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기다림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를 보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귀찮아했습니다. 그는 침묵하라는 꾸지람을 받았지만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외침은 단순히 눈을 뜨고 싶다는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싶었습니다. 다시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다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창조를 보고, 생명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의 갈망은 삶을 향한 갈망이었고, 그 갈망은 예수님의 갈망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전에 그의 마음을 존중하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 질문 속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자유를 얼마나 깊이 존중하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많은 것을 설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을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게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많은 욕망이 서로 얽혀 마음을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오래 머물다 보면 하나둘 불필요한 욕망들이 침묵하기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하나의 갈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평화의 근원이신 분을 원했고,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랑 자체이신 분을 원했으며, 생명을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갈망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보나벤투라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신비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입맞추시려고 고개를 숙이고 계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시며,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두 손을 펴고 계시고, 우리를 당신 안으로 받아들이시려고 옆구리를 열어 놓고 계신다고. 십자가는 하느님의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가장 깊은 갈망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줍니다. 사랑은 끝까지 기다립니다. 사랑은 상대가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둡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침묵으로 외치는 가장 큰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하늘 어딘가에서 우리의 삶을 내려다보며 판단하시는 분으로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와 보나벤투라는 전혀 다른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만난 하느님은 인간의 고통을 피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 한가운데로 들어오시는 분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가장 깊은 상처 안에서 우리를 품으시며, 가장 외로운 시간 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 이전에 함께 계시는 사랑의 상징이며, 희생의 상징이기 이전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관계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갈망은 우리를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갈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상대가 자기 자신이 되도록 기다려 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억누르지 않으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를 차지하려 하지 않으시며, 성령께서는 두 위격의 사랑을 자유롭게 이어 주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고, 내어줌은 언제나 자유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원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참된 우리 자신이 되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갈망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갈망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놀라운 비밀입니다. 우리가 바람처럼 흔들릴 때에도 그분의 사랑은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길을 잃어버릴 때에도 그분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멈추는 날에도 그분의 부르심은 멈추지 않으며, 우리의 사랑이 식어 가는 시간에도 그분의 사랑은 처음처럼 우리를 향하여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라, 끝없이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침내 어느 날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하느님도 평생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내가 그분을 만나려고 애쓴 시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분께서는 나를 품에 안으시려고 두 팔을 벌리고 계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달음의 순간, 갈망은 더 이상 결핍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응답이 됩니다. 그때부터 기도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간청이 아니라,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가 되고, 삶은 하느님을 찾아다니는 방황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신 사랑을 따라 걸어가는 귀향의 여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