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두려움과 관련한 말씀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이사야서도 두려움 중에 하느님 체험과 파견 체험하는 것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막연하게 또는 무조건 두려움은 나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결론처럼 말하면 모든 두려움이 나쁜 것이 아니고,
나쁜 두려움이 나쁜 것이고 좋은 두려움은 좋은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 특히 많은 젊은이가 나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나쁜 두려움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고,
모든 정상적인 관계를 불가능하게 하는 두려움이며,
은둔형 외톨이처럼 자기 안에 갇혀 살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두려움이란 그 반대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저는 이런 구분보다는 다른 구분을 하려고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이것이 좋은 두려움이고
이것이 없으면 나쁜 두려움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진정 좋은 두려움이라고 할 수 없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하느님의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께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이 잘 못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듯
하느님은 부모보다 더 우리가 잘 못 될까 봐 두려워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의 두려움이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거룩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케 하는 거룩한 두려움 말입니다.
오늘 이사야가 이런 거룩한 두려움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오늘 거룩하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것을 외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할 때 그 하느님을 다르게 설명할 수 없고,
오직 거룩하시다는 말 그 하나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나 인간은 더럽다고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사실 우리의 죄책감 또는 죄의식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시시하게 도둑질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그런 죄의식에서는 벗어나고
하느님을 체험하게 하는 죄의식이거나 하느님을 체험할 때의 죄의식이어야 합니다.
이런 거룩한 두려움이 있을 때 하느님께선 우릴 깨끗하게 또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그런 다음에야 이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의 파견에 용감하게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