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복음에서 회당장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는데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는 죽어가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두 복음과 달리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미 죽은 딸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무리한 청을 주님께 하는 것이 아닙니까?
마태오복음은 어쩌자고 죽은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저를 보면서
‘이 신앙 없는 인간아!’하고 저는 준엄하게 저를 꾸짖었습니다.
우리 대다수 인간은 그래도 숨이 붙어 있어야 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죽은 다음에는 다시 살리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숨이 붙어 있을 때는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매달리다가도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하고 의사가 선언하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지요.
그런데 오늘 회당장은 이런 저와 달리 이미 죽었는데도 살려달라고 하지요.
정말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그런 무리한 청을 하는 건가요?
아니면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무작정 매달리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살려달라고 하는 건가요?
제 생각에 회당장은 진실로 믿은 사람이라고 마태오복음은 얘기하고 싶은 것이고,
하느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또한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사실 하느님께는 죽어가거나 죽었거나 다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죽었다고 못 살리실 분이 결코 아니고,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얼마만큼 믿는지,
또 얼마만큼 믿을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인간만큼만 믿을 것인지
하느님만큼 믿을 것인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인간만큼만 믿어서 되겠습니까?
제가 자주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믿음은 도박이고 선택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 믿기로 하면 내 믿음은 점점 쪼그라들어
내 안에 믿음이란 하나도 없을 수 있고,
그래서 내 안의 무신(無信)이 하느님께서 안 계신 무신(無神)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믿기로 선택하고 거기에 나를 다 걸어 버릇을 하면
믿는 만큼, 싹이 나고 자라듯, 믿음이 자라 하느님만큼 내 믿음은 자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론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수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절로 자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주시길 청하는 동시에 믿어버릇하고 걸어버릇해야 합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