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과 통제의 경계
걱정이 지나치면 통제가 되고, 통제가 지나치면 관계는 숨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상대를 살리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어느 순간 상대를 내 뜻 안에 가두려는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통제의 반대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통제의 반대는 신뢰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걱정하고, 배우자가 배우자를 걱정하고, 형제가 형제를 걱정하고, 수도자가 공동체의 형제를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걱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걱정 속에 숨어 있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과도한 부담감과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두려워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두려움을 뚫고 예수 안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괜찮다, 나를 겁내며 살지 않아도 된다." 자기 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몸을 떠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실제로 이 말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위로의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마리아가 특별히 거룩하고 영웅적인 무언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자리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 나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놓는 것, 마리아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그는 세상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잉태한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열 때, 우리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상실을 두려워하고, 타인의 마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두려움의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계산 안에 갇히지 않으시고, 우리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시며,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하느님마저도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거래로 바꾸고, 신앙을 안전장치로 만들고, 하느님의 뜻보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그 자리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인간이 되셨고,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아기가 되셨으며,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앞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 인류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신 말씀은 명령도 아니고 심판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복음은 두려움의 종교가 아니라 신뢰의 초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현존을 선언하십니다. 마리아가 먼저 하느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가 먼저 자신을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은총이 먼저 왔습니다. 사랑이 먼저 왔습니다. 성령이 먼저 오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가장 아름다운 진실입니다.
우리가 바뀌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문 앞에 와 계십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보여 준 위대함은 어떤 영웅적인 업적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위대함은 열려 있음에 있습니다. 붙들지 않음에 있습니다. 통제하려 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이해한 뒤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앞에서도 자신을 열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한마디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앙 고백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것을 내적 가난이라고 부릅니다. 내적 가난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내 뜻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마음 안에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자궁이 말씀을 품은 공간이 되었듯이, 가난해진 우리의 마음도 하느님을 품는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수태고지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안에 오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오늘도 우리 삶 안에서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성취도 아닙니다. 거룩함을 증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열어놓음입니다. 침묵 속에 머무는 것, 기다리는 것, 받아들이는 것,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그리스도는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분임을. 그래서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는 애쓰는 자리가 아니라 머무는 자리이며, 붙잡는 자리가 아니라 내어 맡기는 자리입니다. 마리아처럼 마음의 문을 열어 놓는 사람 안에서 성령은 오늘도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이미 여기 와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삶은 또 하나의 수태고지가 되고, 우리의 존재는 또 하나의 베들레헴이 되며, 우리의 일상은 그리스도께서 세상 안으로 태어나시는 거룩한 자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통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떠나갈 때도 붙잡지 않으셨고,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자유를 허락하셨으며, 유다의 배신마저도 억지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붙드는 사랑이 아니라 허용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역시 형제들을 자신의 작품처럼 만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실패할 자유와 성장할 시간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적 가난은 "당신은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상대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려 하지 않고, 상대 안에 이미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랑은 점점 조용해집니다. 어릴 때의 사랑은 붙잡으려 하고, 불안한 사랑은 간섭하려 하고, 두려운 사랑은 통제하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기다려 줍니다. 성숙한 사랑은 물러서 줄 줄 압니다. 성숙한 사랑은 상대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 드립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걱정 때문에 우리의 삶을 강제로 조종하지 않으십니다. 실패와 눈물과 방황 속에서도 끝까지 곁에 머물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완성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상대를 믿고 기다려 주는 능력입니다. 걱정이 신뢰를 잃으면 통제가 되고, 사랑이 자유를 잃으면 소유가 되지만, 걱정이 신뢰를 만나면 기도가 되고, 사랑이 자유를 만나면 축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기다려 줄 수는 있습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지휘관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고, 통제자가 아니라 형제가 되며,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