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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관계적 내어줌으로 만들어 가는 완전한 오케스트라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Jun 1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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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관계적 내어줌으로 만들어 가는 완전한 오케스트라

 

완전함이란 흠이 없고 티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완전성은 단지 도덕적인 무결함에 머무르지 않습니다.하느님의 완전성은 조건 없는 사랑의 완성이며, 그 정점은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박해자들까지도 품어 안는 자비에 있습니다. 대상을 차별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무한한 포용력,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지니신 완전함의 본질입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 완성되는 '우리 안의 완전성'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는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연스러운 본성을 넘어선 신성한 초대로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완전성, 프란치스칸의 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성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잘하는 능력도 아니고, 흠 없는 도덕적 우월함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성은 사랑이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상태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 돌보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외면하는 사람,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 심지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까지 햇빛과 비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은 정의를 넘어서는 자비이며, 공정함을 넘어서는 선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완전성의 비밀을 "참되고 완전한 기쁨"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형제들에게 인정받을 때가 아니라 거절당할 때, 환영받을 때가 아니라 문전박대당할 때, 사랑받을 때가 아니라 오해받을 때에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거기에 복음의 완전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을 품어 주는 일, 내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을 위해 다시 미소 짓는 일, 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형제를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는 일, 상처를 준 사람의 이름을 기도 안에서 다시 불러 보는 일. 바로 그런 작은 순간들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성이 우리 안에 싹틉니다. 하느님 나라는 완벽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품어 주면서도 끝내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완전성은 결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멈추지 않는 상태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완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원수를 향한 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성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결점의 삶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날마다 사랑의 경계를 조금 더 넓혀 가라는 초대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열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하느님께 맡겨 드릴 때,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완전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간에 자신을 내어주는 관계적 내어줌에서 배우는 완전성은 우리의 관계에서 완전해지는 법을 통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관계를 통해서 충족될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완전성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완결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를 향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받아들이시는 관계적 충만함입니다. 하느님 안에는 고립된 완전함이 아니라 사랑의 순환과 상호 내어줌이 있습니다. 성부께서는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성자에게 내어주시고, 성자는 받은 모든 것을 다시 성부께 돌려드리며, 성령은 그 상호 사랑과 기쁨의 결합 안에서 끊임없이 흐르십니다. 삼위일체의 완전성은 누구도 혼자 완전하지 않고, 서로 안에 머물며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관계 안에서 완전하다는 신비를 보여 줍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혼자 완전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는 지혜가 있지만 따뜻함이 부족하고, 누구에게는 열정이 있지만 인내가 부족하며, 누구에게는 깊은 신앙이 있지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부족함을 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부족함 자체를 결함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온유함을 형제에게서 배우고, 내가 부족한 용기를 자매에게서 얻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공동체가 보게 하시며, 내가 넘어질 때 누군가의 손을 통해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래서 관계는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완성해 가시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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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형제성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름 때문에 나는 더 풍요로워집니다. 내가 없는 것을 그가 가지고 있고, 그가 없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 가난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나는 혼자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가능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경쟁자가 아니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빈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형제성은 그 빈자리를 서로의 선물로 채워 가는 삶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상호 내어줌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완전함이란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사랑으로 채워 주는 것입니다. 완전함이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꺼이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상태입니다. 완전함이란 홀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선물처럼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 또한 삼위일체처럼 서로에게 선물이 되고 서로를 완성시키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완전성은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관계의 열매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며 하나가 되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살리고 성장시키며 함께 하느님의 충만함에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전해져 갑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누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적 완전성이 우리 일상의 형제성과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하려면 견딤과 기다림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들입니다 견디고 기다려주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 커질때 받는 성령의 에너지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에너지가 없이 원수 사랑과 나를 힘들게 하고 박해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 사랑은 인간의 의지력만으로 이루어 내는 도덕적 영웅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힘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만이 조금씩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순서는 다릅니다. 먼저 하느님께 사랑받고, 그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에 자신을 맡길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서도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를 비추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길에는 반드시 견딤과 기다림이 따라옵니다. 상대가 변하지 않아도 견디는 것, 오해가 풀리지 않아도 기다리는 것, 배신당한 뒤에도 섣불리 단죄하지 않는 것, 상대의 성장과 회개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이런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내적 가난은 상대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려는 자리를 비우고 하느님께 그 사람의 시간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견딤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아직도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적극적인 신뢰입니다. 기다림도 무기력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기다려 주셨듯이 나도 누군가의 성장과 회복을 기다려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기다려 주셨고, 깨닫지 못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배반하고 외면할 때에도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도, 제자들이 모두 도망쳤을 때도, 십자가 아래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견딤은 사랑의 시간이고, 기다림은 자비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의 끝없는 상호 내어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오래 견딜 수 있고, 더 넓게 품을 수 있으며, 더 깊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원천이 더 이상 내 작은 마음이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원수 사랑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넘치는 열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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