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 11,30 묵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은 짐이 없는 삶을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나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면서, 그 짐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짐 자체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은 짐의 무게보다도 그것을 혼자 지고 가려는 마음입니다.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병고의 아픔, 미래에 대한 불안,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우리의 어깨를 누릅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 속에서도 어떤 이는 평화를 잃지 않고, 어떤 이는 무너집니다. 차이는 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짐을 누구와 함께 지고 가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겨릿소의 멍에와 같습니다. 어린 소는 모든 무게를 감당하지 않습니다. 경험 많고 힘센 소가 대부분의 무게를 지고, 어린 소는 그 곁에서 발을 맞추며 걸어갈 뿐입니다.
신앙은 내 짐을 없애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보조를 맞추어 걷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에서 말하는 내적 가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옳아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를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행위 이전에, 하느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침묵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 또 사과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짐을 가볍게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종종 십자가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부하는 데서 더 커집니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할 수 없이, 지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없애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십자가를 함께 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갈릴래아 호숫가의 베드로가 실패와 죄책감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짐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씀은 사실 이런 뜻에 가깝습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가 넘어질 때 내가 함께 일어나 주겠다. 네가 울 때 내가 함께 울겠다. 네가 길을 잃을 때 내가 길이 되어 주겠다. 네가 짐에 눌려 주저앉을 때 내가 그 짐의 무게를 함께 지겠다.
신앙은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기적이 아니라, 그 짐을 함께 져 주시는 분을 발견하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뒤돌아보면, 짐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라 짐을 지고 가는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새로워졌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짐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을.
하느님은 삼위일체 관계적 사랑이시고 나는 그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사랑받음에 응답하기 위하여 내 자유를 도구적 존재로 내어드릴 때마다 부할하신 주님의 영께서 내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은 사랑받음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의 현장, 관계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학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이 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예수님이라는 사랑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며 자신을 살핍니다. 성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는 그 학교에서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닮으려다 그분처럼 되신 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