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0,7–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리고 이어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말고
여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집에 들어가든 평화를 빌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주 또렷하게 보여 줍니다.
제자는 자기 이름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 소식은 단지 말에 머물지 않습니다.
병든 이를 살피고
부정하다고 밀려난 이를 깨끗하게 하며
사람을 묶고 있는 어둠에서 풀어 주는 실제적 행위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설명만이 아니라 치유와 해방의 사건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말씀에서 제자의 단순함과 청빈을 깊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돈주머니와 여벌을 챙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준비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세상의 힘과 계산에 기대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의 힘은
무장과 소유에서 오지 않고
보내시는 주님께 대한 신뢰에서 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의 안전장치에 꽉 매여 있다면
거저 받은 은총의 자유를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크리소스토모의 시선으로 보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복음의 심장을 드러냅니다.
은총은 거래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값을 치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먼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삶도
계산보다 증여,
보상보다 나눔,
통제보다 신뢰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내 공로처럼 붙들지 않고
다시 흘려보내는 삶,
그것이 복음적 제자의 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먼저 평화를 빌라고 하신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첫걸음은
정답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눌러 이기려는 태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 하느님의 평화가 머물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복음 선포가 거칠고 교만한 방식이 아니라
삶과 태도 안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진실이어야 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는 먼저 평화를 가진 사람이어야
평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성실 / 온유 / 절제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성실을
끝까지 복음의 사명을 붙드는 힘으로 보여 줍니다.
보상이나 박수 때문이 아니라
맡겨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걷는 꾸준함입니다.
온유는
집마다 평화를 빌며 들어가는 태도 안에서 선명해집니다.
상대를 정복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의 평화를 먼저 건네는 마음입니다.
절제는
많이 지니고 많이 확보하려는 본능에서 벗어나
주님이면 충분하다는 신뢰 안에 머무는 지혜입니다.
오늘 목요일 성모님의 날에
이 말씀은 더욱 따뜻하게 들립니다.
성모님은 복음을 요란하게 소유하지 않으셨고
조용히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세상 안으로 흘러 들어가
생명을 살리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과시나 힘이 아니라
평화와 단순함,
섬세한 배려와 신뢰를 지녀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실은 내 생각과 내 불안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흘려보내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 앞에 평화를 가지고 들어가는가,
아니면 긴장과 자기주장을 들고 들어가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평화의 제자로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
복음을 제 소유물처럼 붙들지 않게 하시고
거저 받은 은총을 거저 나누게 하소서.
평화를 먼저 전하는 온유를 주시고
불필요한 무장을 내려놓는 절제를 주시며
맡겨진 사명 안에 끝까지 머무는 성실함을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