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집을 마련하는 사람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살아 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세상의 시간 기준으로 보면 이미 아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여전히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부르십니다. 이는 육체적 죽음이 인간의 끝이 아니며, 하느님의 생명 안에서 그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뜻합니다.
단절되지 않는 계약과 신실함하느님은 과거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들과 맺으셨던 그 사랑과 구원의 계약은 그들이 죽은 후에도,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보증"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이 선언은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을 줍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음이나 소멸, 허무를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 생명을 영원히 유지시키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슬퍼할 때, 이 말씀은 큰 위로를 줍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품 안에서 가장 온전하게 살아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그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산 이들'임을 일깨워줍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가운데 있다.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과 함께 마무신다.”
하느님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은 단지 죽은 뒤의 부활만을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가 죽음으로도 끊어질 수 없다는 선언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의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앎'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 안에 머물고, 서로의 생명에 참여하는 깊은 관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죽은 뒤에 받게 될 어떤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 맺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마음과 삶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에 도착할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관계의 공간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곳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품어 줄 때, 한 형제가 다른 형제의 짐을 함께 져 줄 때, 한 공동체가 서로의 부족함을 판단하기보다 기다려 줄 때, 그곳에 하느님 나라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묵시록은 그 완성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결국 구원의 완성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보다 더 깊은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 안으로 내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아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은 죽음도 끊을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이것을 내적 가난과 형제성 안에서 살아갑니다. 내적 가난은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고, 형제성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시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형제를 알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의 문턱을 넘어선 것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그곳에 내가 있으며, 너희가 함께 머무는 그곳이 곧 나의 집이다.”
일상의 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소리 내어 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고 구체적인 관계의 자리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아침에 누군가를 깨울 때 짜증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선택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식탁에서 마지막 반찬을 내가 먼저 집지 않고 상대에게 슬며시 밀어 주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말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한 번 숨을 고르고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상대가 실수했을 때 “왜 그랬어?”보다 “괜찮아, 다시 해보자”라고 말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상처 입은 관계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오래된 서운함을 다시 꺼내 공격하지 않고 오늘의 대화를 새롭게 시작해 주는 순간, 하느님 나라는 과거의 무덤을 열고 부활의 숨을 불어넣습니다. 누군가의 약점을 알면서도 그 약점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침묵, 그 침묵 안에 하느님 나라는 숨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말이 느린 사람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줄 때, 일을 잘 못하는 사람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길을 찾아 줄 때, 내 방식이 옳다고 우기기보다 상대가 살아온 길을 존중해 줄 때, 하느님 나라는 관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랍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이기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나는 곳입니다. 가정에서는 밥을 차리는 손길, 설거지를 대신하는 작은 배려, 피곤한 얼굴을 알아보는 눈빛, “오늘 힘들었지?” 하고 묻는 한마디 안에 있습니다. 형제회에서는 먼저 인사하는 마음, 낯선 형제를 가운데 앉히는 친절, 늘 조용한 사람에게 발언의 자리를 내어 주는 배려, 다른 의견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겸손 안에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는 나만 옳다고 말하던 마음이 조용히 낮아지고, 상대도 하느님 앞에서 사랑받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프란치스칸 내적 가난은 관계 안에서 내가 중심이 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를 고치려 하기보다 먼저 받아들이고, 소유하려 하기보다 놓아주며, 판단하려 하기보다 축복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는 완성만이 아니라 오늘 내가 누구에게 조금 더 부드러워지는 자리, 조금 더 작아지는 자리, 조금 더 기다려 주는 자리, 조금 더 용서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머무십니다. 거기가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