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말씀나누기

2026년 6월 3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Jun 02,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No Attached Image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코 12,18–27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여인이 차례로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경우를 들어
부활 때에 그 여인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겉으로는 율법 문제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활 신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현세의 질서를 그대로 연장하여
영원의 신비를 재단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부활한 이들은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모세의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하신 말씀을 들어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신비를 말할 때
언제나 인간의 사고가 하느님의 생명을 다 담아낼 수 없음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보면
사두가이들의 문제는 단지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을 너무 작은 인간 계산 안에 가두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을 현세의 반복으로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지금 여기의 소유 관계와 제도적 관계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생명의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하신 말씀은
매우 깊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안의 살아 있는 하느님을 놓칠 수 있고,
신앙을 말한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내 상식 안에만 가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겸손과 경외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 한 조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를 넘어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가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생명은
무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조상들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기억도, 언약도, 사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단지 먼 미래의 위안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
우리 존재가 붙들려 있다는 고백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의 관점에서 보면
부활은 단순히 죽은 뒤 다시 시작된다는 뜻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신비입니다.
인간은 이 땅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지만
그 관계의 최종 완성은 소유와 배타, 혈연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더 깊은 친교로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의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더 밝게 드러냅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살리는 친교라는 사실입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내가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일을
내 익숙한 틀 안에만 가두려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부활도, 은총도, 공동체도
내 경험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죽은 습관과 굳은 사고 속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성찰은 바로
내 신앙이 살아 있는가를 묻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열려 있는지,
아니면 이미 닫힌 결론 속에 스스로 갇혀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의 관점에서도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과 언어, 관습 때문에 갈라지기 쉽지만
모두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참된 일치는
서로를 논리로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함께 경외하고 함께 듣는 데서 자랍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면
교회도 살아 있어야 하고
관계도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너무 작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살아 계신 하느님보다
내 계산과 익숙한 틀만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관계를 소유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느님 안의 친교로 배우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죽음의 논리보다
생명의 진실을 더 크게 들려주십니다.

주님,
제 좁은 생각 안에 당신을 가두지 않게 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에 마음을 열게 하소서.
죽은 습관과 굳은 판단에서 벗어나
당신 안에서 새로워지는 생명을 믿게 하시며
관계를 소유가 아니라 친교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