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이 죽는 현장에 하느님의 현존이 머뭄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과 겸손 안에서 한 알의 밀알이 죽는 현장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고통을 참으라는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생명이 어떻게 깊어지고 확장되는가를 보여주는 존재의 신비입니다. 씨앗은 자기 모습을 끝까지 붙들고 있을 때에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껍질은 단단히 남아 있지만 생명은 닫혀 있습니다. 하지만 씨앗이 흙 속으로 내려가 자기 형체를 잃어버릴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사실은 더 큰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바로 이러한 밀알의 길과 닮아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을 적게 소유하는 삶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내려가는 죽음이며 내려놓는 죽음입니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 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내 이름과 내 공로를 남기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성이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할 것 같고, 더 높이 올라가야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보여 줍니다. 생명은 움켜쥠 속에서가 아니라 내어줌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내려간다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강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은총 또한 늘 낮은 자리로 흐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의 가난은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선이 지나갈 자리를 마련하는 삶입니다. 자기 생각과 자존심, 자기 방식과 자기 확신을 절대화하지 않고, 그것들을 하느님의 손 안에 조용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죽음이란 결국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집착이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의 겸손은 자신을 억누르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허용하는 죽음이며 놓아주는 죽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 안에서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 타인이 내 기대와 다르게 살아갈 자유를 허용하는 것, 세상이 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조급함 속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붙들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죽어가는 데 있습니다.
참된 겸손은 부드럽습니다. 억지로 자신을 누르지 않기에 오히려 자유롭고 따뜻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소유하지 않고, 염려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놓아주는 죽음이란 사람을 내 뜻 안에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그 존재 자체를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러한 자유를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려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형제로 만났습니다. 해도 형제였고 바람도 형제였으며 물도 누이였습니다. 소유하지 않았기에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지 않았기에 세상 전체를 사랑 안에서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 또한 바로 이 길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섬김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자아가 죽어가는 자리입니다. 형제를 위해 양보하는 자리, 공동선을 위해 나를 내려놓는 자리, 이해받지 못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자리, 바로 그곳에 주님께서 먼저 계십니다.
밀알은 홀로 죽지만 홀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생명이 죽음을 통과하며 수많은 열매로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칸의 가난과 겸손도 삶을 파괴하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려 사랑이 흐르게 하는 죽음입니다. 내려가는 죽음과 내려놓는 죽음, 허용하는 죽음과 놓아주는 죽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지 않기에 가벼워지고, 소유하지 않기에 충만해지며, 자기를 비웠기에 모든 존재를 형제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안에는 더 이상 나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밀알처럼 흙 속에 스며든 작은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조용히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관계 안에서 죽어가는 밀알의 신비
밀알의 죽음은 추상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아주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육체의 마지막 순간으로 생각하지만, 복음이 말하는 죽음은 매일의 관계 속에서 자기중심성이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밀알은 혼자 있을 때는 죽지 않습니다. 관계라는 흙 안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죽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관계는 늘 나의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타인, 내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형제, 내 수고를 몰라주는 공동체, 내 사랑을 오해하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단단히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밀알의 죽음은 먼저 “내가 옳다”는 확신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내 판단으로 먼저 결론 내리려는 마음,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내 입장을 증명하려는 조급함, 내 상처만 크게 여기고 타인의 아픔은 작게 여기는 무의식이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밀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기 시작합니다. “내가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이 내려가는 것,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욕망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내 방식이 가장 옳다”는 단단함이 부서지는 것, 그것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죽음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밀알은 죽습니다. 사랑받고 싶지만 먼저 사랑해야 하는 순간, 이해받고 싶지만 먼저 이해해야 하는 순간, 피곤하고 지쳐 있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어야 하는 순간 속에서 자아는 조금씩 자기 자리를 내어줍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는 상대를 바꾸려는 욕망이 죽어야 사랑이 살아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는 내 기대대로 성장시키려는 통제가 죽어야 한 존재의 고유함이 살아납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비교와 경쟁이 죽어야 형제성이 피어납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이 말하는 가난과 겸손도 결국 이 관계의 죽음을 말합니다. 가난은내 주장과 자존심을 내려놓는 죽음입니다. 언제나 내가 주목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조용히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허용하는 죽음입니다. 내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재단하려는 마음, 내 방식으로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이 천천히 힘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의 밀알의 죽음은 대부분 화려하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를 삼키는 일, 억울해도 상대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일, 내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 일, 상대를 기다려 주는 일,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일, 사과할 줄 아는 일, 먼저 손 내미는 일,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일 속에서 밀알은 조용히 썩어갑니다. 그러나 바로 그 썩어감 속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힙니다.
한 사람의 인내가 공동체를 살리고, 한 사람의 양보가 관계를 회복시키며, 한 사람의 침묵이 분열을 멈추게 하고, 한 사람의 따뜻함이 얼어붙은 마음을 녹입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이 관계를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복음은 죽을 줄 아는 사람이 관계를 살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며, 끝까지 용서하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밀알의 죽음은 결국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 죽음은 자신을 없애버리는 파괴가 아니라 더 큰 생명을 위한 열림입니다. 그래서 참된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위해 죽어가는 자리에서 탄생합니다. 자존심이 죽고, 소유욕이 죽고, 통제하려는 마음이 죽고, 비교와 경쟁이 죽어갈 때 비로소 그 자리에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밀알이 죽는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임을 경험으로 알아듣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알의 밀알들입니다. 내가 속한 그 곳에서 한알의 밀알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교사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