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적 삶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길
신앙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과거를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야 오시는 분도 아니고, 죽음 이후의 어느 먼 문턱에서야 비로소 만나는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 내 손에 닿는 빵과 물, 내 곁에 앉은 사람의 숨결, 오늘 나에게 맡겨진 작고 평범한 사건들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성사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이 눈에 보이는 표징 안으로 내려오는 것, 하늘이 땅을 피하지 않고 영원이 시간을 경멸하지 않으며 하느님이 인간의 일상 안으로 겸손히 몸을 낮추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사는 과거의 거룩한 사건을 추억하는 장식이 아닙니다. 미래의 천국을 약속하는 먼 보증서도 아닙니다. 성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느님을 맛볼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평범한 지금이 비어 있지 않고, 이 작고 초라한 오늘이 하느님 없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는 가장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을 과거로 돌려보냅니다. 아름다웠던 전통, 익숙한 형식, 이미 굳어진 질서와 안전한 언어 안에 하느님을 가두려 합니다. 또 때로는 신앙을 미래로 밀어냅니다. 언젠가 죽은 뒤에야 받을 보상,
언젠가 도착할 천국, 언젠가 완성될 구원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영원은 지금을 통과하지 않고 오지 않는다. 천국은 오늘의 사랑을 외면한 사람에게 먼 훗날 갑자기 열리는 낯선 장소가 아니다. 천국은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는가 안에서 이미 연습되고, 시작되고,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순간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지금 내 앞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지금 내게 맡겨진 작은 책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지금 내 마음의 두려움과 집착을 어떻게 놓아 보내는지,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말보다 먼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부터 변화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굳어진 마음에서 벗어나라는 부르심, 자기중심성의 감옥을 떠나라는 초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참된 나로 서라는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때때로 그 복음의 불꽃을 제도와 습관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 놓아버림에서 시작된 길이 집착이 되고, 변화에서 시작된 신앙이 저항이 되며, 비움에서 태어난 복음이 기득권을 지키는 견고한 성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신앙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체제가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됩니다. 성사는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맛보는 신비가 아니라 익숙한 절차와 소속의 표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순수한 하느님 체험은 우리 안의 지배적 의식을 무너뜨립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말합니다. 더 완벽해져라. 더 유능해져라. 더 부유해져라. 더 인정받아라. 더 옳아 보여라.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 모든 조건이 힘을 잃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가난하고 평범한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진실하게 바라보게 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아무 집단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이 아닙니다. 또 어떤 집단을 무조건 지지하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반응도 아닙니다. 좌파와 우파, 유행과 반유행, 순응과 저항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도 타인의 시선과 집단의 논리에 묶여 있다면 그 모두는 아직 깊은 자유가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자유는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도구적 존재로 나를 내어드린 자리,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자리,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성소, 하느님의 숨결이 조용히 나를 움직이는 그곳에서 사랑과 진리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자유인은 세상의 소란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박수에 취하지도 않고 비난에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남들이 정해 준 이름으로 자신을 살지 않고, 하느님이 불러 주시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사랑 받음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 두려움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깊은 고요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사적 삶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삶, 평범한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삶, 내 곁의 사람을 방해물이 아니라 은총의 표징으로 맞이하는 삶, 나의 가난함과 부족함까지도 하느님께서 머무실 수 있는 자리로 내어드리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집은 먼 하늘 어딘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관계 안에 있다” 그 집은 성령께서 머무시는 내면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의 기준에서 잠시 물러납니다. 비교의 소음에서 벗어나고, 완벽해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풀려나며, 가짜 자유의 껍데기를 벗고 참된 자신으로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우월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을 맛보는 사람은 미래의 천국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 한마디를 천국의 언어로 바꾸고, 오늘의 손길 하나를 성사의 표징으로 만들며, 오늘 만나는 사람 하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자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현존이 됩니다. 종교는 체제가 아니라 생명이 됩니다. 성사는 예식 안에 갇힌 표지가 아니라 온 삶을 비추는 은총의 방식이 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비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는 하느님이 부재하시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 순간은 이미 은총으로 꽉 차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멈추어 보고, 놓아버리고, 성령의 숨결에 마음을 열 때 비로소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신앙인은 먼 곳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합니다. 지금 이 사람을 용서합니다. 지금 이 삶을 받아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찾던 영원은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이 순간 안에 계셨고, 이 평범한 오늘 안에 숨어 계셨으며, 제 안 깊은 곳 성령께서 머무시는 가난한 자리에서 저를 참된 자유로 부르고 계셨습니다. 사랑받았기에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관계가 깊어집니다. 깊어진 관계 안에 하느님의 거처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