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번 주 성령 강림을 준비하면서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의 뜻이 무엇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령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우선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골똘히 뭘 생각한다고 하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적으로는 나쁜 뜻이 아니고,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한다는 좋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을 빼놓고 하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준에서 보면 성령적 즉흥성과 무위성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적 즉흥성은 성령께서 시키는 것이라면 지체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임을 알았을 때
자기의 생각이나 신중함을 배제하고 곧바로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시 따른 것이 그것이고,
프란치스코가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을 들었을 때 성령 안에서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다.”라고 기뻐 외치며
자기가 들은 바를 심혈을 기울여 이룩함에 있어서 시간이 경과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즉시 실행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1첼라노 22번 참조)
성령적 무위성(無爲性)은 노자의 무위지위(無爲之爲)와 같으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내가 뭘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성령께서 주도하시도록 나를 내려놓은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릅니다.
그래서 성령에 사로잡히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면 싫은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그런 대단한 경지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 나병환자를 그렇게 싫어했고
그래서 나병환자를 만날까 그렇게 두려워했는데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는 은총 체험을 하고 나서
나병환자뿐 아니라 온갖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요.
오늘 바오로 사도도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자기에게 닥칠 일을 이런 경지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면 갈 수 없는 곳과 할 수 없는 것을
성령에 사로잡히면 갈 수 있고 할 수도 있음을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