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6,20–23ㄱ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은
고난의 현실을 부정하는 위로가 아니라
그 고난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슬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슬픔을 정직하게 인정하시면서도
그 끝이 절망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를 드십니다.
아기를 낳을 때 여인은 괴로워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그 고통을 넘어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누립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슬픔이 단지 잃어버림의 슬픔이 아니라
새 생명을 품고 있는 진통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눈물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때가 되면 다른 차원의 기쁨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기쁨을 세상이 주는 가벼운 즐거움과 구별했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상황이 바뀌면 쉽게 사라지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하느님 안에 뿌리내리기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슬픔이 없어진다”가 아니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은 우리 삶의 아픈 시간들을
그저 지워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시간마저도 새 생명의 자리로 변화시키시는 분입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덜어 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절망을 덜어 내야 하고,
조급한 결론을 덜어 내야 하며,
눈앞의 감정만이 전부라는 생각을 덜어 내야 합니다.
아낌은 슬픔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는 지혜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지금의 눈물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필요한 자기소모를 줄이고
약속을 붙드는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안에서만 인간의 마음이 참된 안식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기쁨도 바로 그 안식과 연결됩니다.
기쁨은 문제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이 내 삶을 붙들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슬픔 한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기쁨으로 이끄신다는 믿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깊은 위로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은 기뻐할 것이고
아무도 너희에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소중합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상황이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을 다시 뵙는 기쁨,
주님과 다시 연결되는 기쁨,
주님이 여전히 내 곁에 계시다는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복은
주님을 다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슬픔 속에 있는가?
그 슬픔을 끝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 안에서 변화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빨리 편해지기만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통해
더 깊은 기쁨을 빚으실 수 있음을 믿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물을 무시하지 않으시면서
그 눈물 너머의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주님,
제 슬픔이 절망으로 굳어지지 않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기쁨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눈앞의 고통만 보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더 깊이 믿게 하시며
빼앗기지 않는 기쁨 안에
저를 머물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