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4,7–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을 보았다.”
그러자 필립보가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하느님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멀리 있는 관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과 말씀, 행동과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종교 지식을 더 많이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는 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충만함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따로 떨어진 분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머무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분,
생명을 살리시는 분,
두려움보다 신뢰를 주시는 분,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함께하시는 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에 대한 깊은 진실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보여 달라”는 인간의 갈망에 대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마침내 얼굴을 내어 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만날 수 있는 분,
들을 수 있는 분,
따를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기쁨은
모든 질문이 다 사라져서 오는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피어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는 필립보의 말처럼
인간의 깊은 목마름은
마침내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도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이어 가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 사람은
이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바로 이 자리에서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내 욕망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과 일치하여
세상 안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밝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이
이웃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타인의 존엄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내가 혼자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사랑이 내게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깊어집니다.
오늘 토요일 이웃종교/생태의 날에
이 말씀은 더 넓어집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세상 안의 수많은 얼굴도 함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말없이 신음하는 피조물 안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더 조심히 대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일입니다.
주님,
당신 안에서 아버지를 보게 하시고
그 얼굴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을 말로만 찾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닮아
이웃과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당신을 따르고
기쁨 안에서 당신 일을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