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0,22–30
예수님께서는 성전 봉헌절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으십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사람들은 분명한 말 한마디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이름이나 주장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하시는 일과
당신께 속한 이들이 듣는 목소리를 통해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대 바실리오는
하느님을 아는 길이
단지 개념을 더 많이 쌓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생명 안에 참여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곧 믿음은
멀리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지식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진실하심 안으로 들어가
삶으로 응답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양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소속을 표시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목소리에 마음이 길들여지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의 삶은 흔들리고,
마음은 쉽게 두려워지며,
세상은 늘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께 속한 이들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십니다.
대 바실리오는
하느님의 손길을
억지로 누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을 보존하고 자라게 하는 선한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그분께 붙들려 있다는 것은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참 생명 안에 놓이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나에게 매여 있다”는 선언이 아니라
“너희는 내 안에서 잃어버려지지 않는다”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에 대한 아주 깊은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상대를 내 뜻대로 붙잡아 두는 집착이 아니라
상대가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억누르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보다 신뢰가 자라고,
불안보다 평화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기쁨은
바로 여기에서 피어납니다.
기쁨은 일이 다 잘 풀릴 때만 오는 가벼운 만족이 아닙니다.
참된 기쁨은
나는 버려지지 않았고,
주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손 안에서 지켜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내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을 때
기쁨은 더 깊어집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비교와 성과,
불안과 통제의 소리만 듣고 있는가?
주님의 목소리는
크게 몰아붙이지 않으시지만
분명히 생명 쪽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서둘러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손 안에서
차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붙드시는 예수님의 손이
곧 아버지의 손임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실하심 자체 안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 안에서
사랑은 더 깊어지고
기쁨은 더 단단해집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세상의 큰 소리보다
당신의 조용한 부르심을 따르게 하소서.
제가 흔들려도
당신 손 안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살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