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사울의 회개와 관련하여
그의 행위랄까 동작을 가지고 오늘은 한 번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스테파노의 순교에 이미 가담한 사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로 갑니다.
어제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에 관해서 봤고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믿음 대로 갔다고 이미 얘기한 바 있지요.
그러므로 회개 이전의 상태랄까 단계는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또는 자기 생각이나 믿음 대로 가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섬긴 사울인데도
하느님께 이끌리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굳게 믿고 죽이러 간다는 것입니다.
살기를 내뿜은 것을 보면 그의 맘에 증오가 마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증오심으로 예수님 상 머리를 망치로 부순 이스라엘 병사처럼 사울도 증오심으로
죽이러 가면서 옳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하느님 뜻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요즘 고백성사 주며 자주 듣는 고백이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죽었으면,
죽기 바라는 것은 너무한 것 같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신자들이 훌륭하고 올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 죄가 크고 악해도 죽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맡기지 않고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것이 되는 거지요.
둘째로 이런 사울을 하느님께서는 엎어지게 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 스스로 엎어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엎어졌거나 스스로 엎어졌다고 생각했다면 사울은
회개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자책이나 하다 끝났을 겁니다.
셋째로 사울은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고
주님께서 엎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엎어짐으로써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게 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주님께 여쭙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이때까지 사울에게 하느님은 저 높이 초월적으로 계시는 분이지 땅에까지 오시어
엎어트리기도 하시고 눈이 멀게도 하시고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놀랍게도 자기 삶 안으로 들어오시어 직접 개입하시는 주님임을 처음 체험합니다.
넷째로 사울은 사흘 동안 눈이 멀었고 식음을 전폐한 뒤에야 다시 보게 됩니다.
새로운 눈이 열리려면 사흘이 필요합니다.
이 사흘은 물리적인 사흘이 아니라 새로운 눈이 열리기까지의 시간이고,
주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난 사흘을 뜻하는 것으로서
부활의 사흘이요 영적인 사흘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바오로 사도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봤지만
우리는 3년이 될 수도 있고 삼십 년 사십 년이 될 수도 있겠지요.
빨리 완전히 죽으면 빨리 살아날 텐데 그러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다섯째로 세례받고 밥 먹어 기운을 차린 뒤 며칠 제자들과 함께 지낸 다음
사울은 곧바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과 화해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공동체와 화해하는 것,
이것이 회개의 한 결과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도 회개의 다른 결과입니다.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넷째까지는 ‘됩니다.’의 계속이었고,
다섯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회개 생활을 시작하게 하셨다고 했듯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도 시작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게 된 것이고 그런 다음에
공동체와 화해하고 복음을 선포함으로 주님이 시작하신 회개의 은총을 완성합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은총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완성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