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칸 정체성의 근원에 대한 묵상
복음으로 존재하는 삶
작은형제들의 정체성은 어떤 기능적 유용성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잘하는 집단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를 닮아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가난하시고 겸손하시며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의 형식으로 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형제들의 삶 전체가 하나의 증언이 됩니다. 설령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들의 단순함과 기쁨, 형제애와 낮아짐, 소유하지 않으려는 자유와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사는 태도 안에서 이미 복음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형제들의 삶이 어떤 사명 이전에 하나의 형태, 곧 삶의 양식임을 말해 줍니다. 활동은 그 양식의 표현일 뿐이고, 사도직은 그 존재의 열매일 뿐입니다. 존재가 바르지 않으면 활동은 복음의 껍데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존재가 복음에 깊이 잠겨 있다면, 가장 작은 몸짓 하나도 이미 복음화가 됩니다. 형제가 형제를 대하는 태도, 가난한 이를 만나는 눈빛, 권력을 대하는 거리감, 세상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방식, 이런 모든 것이 곧 복음의 현존이 됩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코의 의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작은형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먼저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이 자기 존재 안에 먼저 살아 있게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존재의 진실함에서, 참된 복음화는 빛처럼, 열처럼, 향기처럼 흘러나옵니다.
인간은 흔히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로 자신을 규정하려 합니다. 우리는 역할로 자신을 설명하고,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며, 결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모든 흐름을 조용히 뒤집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먼저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가 아니라, “너는 누구로 존재하고 있느냐.”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시작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떤 사명을 조직하거나 특정한 활동을 제도화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의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남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형식, 곧 복음 자체를 살아내는 존재 방식을 남겼습니다.
형제들의 삶은 처음부터 어떤 ‘해야 할 일들’로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환자를 돌보는 사람으로만, 설교하는 사람으로만, 가난을 실천하는 수행자로만 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삶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복음이 그들의 존재의 뿌리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것, 다시 말해 복음이 그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존재가 먼저이고, 행위는 그 열매입니다
프란치스칸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입니다. 존재가 바르게 서 있을 때, 행위는 그 자체로 올바른 방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존재가 흐려지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은 쉽게 자기 과시나 의무감, 혹은 불안의 산물이 되고 맙니다. 복음적 삶은 외적인 활동의 총합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자리 잡으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대신 나는 관계 안에서, 만남 안에서, 주어지는 순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행위는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 흘러나오는 생명이 됩니다.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사랑이 스며나오고, 겸손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낮아짐이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행위, 곧 복음성이 낳는 열매입니다.
복음성 : 존재를 불태우는 내적 불
작은형제들의 정체성을 가장 깊이 규정하는 것은 “복음성”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복음을 믿거나 따르는 차원을 넘어, 복음이 존재의 형식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복음성은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습니다. 이 불은 우리를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화하고 밝히며 따뜻하게 합니다. 이 불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점점 더 자유로워지며, 점점 더 관계적인 존재가 되어 갑니다. 복음성은 우리를 아래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더 작은 자리로, 더 낮은 자리로, 더 가난한 자리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복음화 :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열
복음화는 흔히 어떤 활동이나 사명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칸 관점에서 복음화는 복음성의 결과입니다. 복음성이 불이라면, 복음화는 그 불에서 나오는 빛과 열입니다. 불이 존재할 때 빛과 열은 저절로 퍼져 나가듯이, 복음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을 때 복음은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화는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투명함에서 비롯됩니다. 어떤 사람의 삶을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 자유와 따뜻함이 느껴진다면, 이미 복음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보다 삶이 먼저이고, 가르침보다 존재가 먼저입니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남긴 가장 깊은 가르침은 바로 이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말로도 복음을 전하라.” 그러나 그 말 이전에 이미 삶이 복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복음적 존재
복음성은 고립된 개인의 덕행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 드러납니다. 형제를 대하는 태도, 가난한 이를 바라보는 눈빛, 세상과 권력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깊이 안에서 복음성은 구체화됩니다. 복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관계를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경쟁과 비교, 소유와 지배의 논리로 관계를 맺지 않고, 선물과 나눔, 경청과 존중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단절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흐르는 이야기, 곧 은총의 흐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도구적 존재’가 됩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나를 통해 선이 흐르고 사랑이 드러나도록 내어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복음이 되는 자리
프란치스칸 영성의 궁극적인 지향은 분명합니다. 삶 자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더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고,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을 비워내고,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더 이상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된 선물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남긴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활동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이며, 성취의 길이 아니라 비움의 길이고, 증명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 존재의 중심을 바꾸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바뀔 때, 우리의 모든 삶은 자연스럽게 복음의 빛을 띠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은형제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되어 살아가는 것. 그때 우리의 침묵도 말이 되고, 우리의 작은 몸짓도 선포가 되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세상 안에 스며드는 거룩한 복음이 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나오는 자비, 도구적 존재, 기쁨에 찬 가난, 내어주시는 몸을 받아들여 내어주는 몸으로 응답하는 가운데 나에게서 내가 해방되는 자유가 그 본질을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