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45–56
라자로가 살아난 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 표징을 행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가 와서
우리의 자리와 민족을 없앨 것이다.”
대사제 카야파는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모두가 멸망하는 것보다 낫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장면을 통해
두려움이 어떻게 ‘정의의 언어’를 가장한 폭력이 되는지 봅니다.
카야파의 말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책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 체제와 권력을 지키려는 계산이 섞여 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공동선”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두려움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역설을 드러냅니다.
카야파의 말은 악의 계산이었지만,
하느님은 그 말마저도
구원의 신비 안에서 새 의미로 바꾸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폭력의 승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영성 주간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때로 불편함과 저항을 부르더라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성 암브로시오의 눈으로 우리는 배웁니다.
참된 공동선은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이를 살려내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님,
제가 두려움으로 선을 말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공동선을 선택하게 하소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평화가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자비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