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과 실패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
신앙의 역설, 역설의 복음,
나는 불완전함과 실패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을 뒤늦게 배웠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위로 향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더 나아지고, 더 정결해지고, 더 완전해질수록 그분께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고, 부족함을 숨기며, 실패를 지워가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새 성장과 성취의 언어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느님은 그 여정의 최종 목표이자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 익숙한 방향을 조용히 뒤집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은 위로 오르는 계단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문이라고 말합니다. 더 완전해져야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 이미 우리를 만나고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위로 향하는 삶’은 사실 에고의 가장 정교한 방식입니다. 성취하고, 인정받고, 완성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은 때로는 종교의 언어를 입고 더욱 거룩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실패한 나를 견딜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마저도 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는 수단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상승을 돕는 분이 아니라, 그 상승 욕망이 내려놓아지는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분은 군중의 환호 속에서 왕좌에 오르신 분이 아니라, 버림받고 오해받으며 결국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것은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가장 깊은 역설입니다. 우리는 실패한 메시아를 믿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십자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피하려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말하면서도, 구원이 시작되는 자리인 ‘무너짐’을 회피합니다. 이 모순 속에서 신앙은 자주 멈춰 서고, 우리는 다시금 성취와 성공의 길로 되돌아가려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역설을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선택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길’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에게 가난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붙들린 자유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선이 흐르는 통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비움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더 큰 사랑에 자신을 맡기는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붙들린 채 놓아버리는 용기가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쥐려 합니다. 성공을, 관계를, 인정받음을, 심지어는 ‘좋은 신앙인’이라는 이미지까지도 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쥐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신앙은 쥐는 기술이 아니라 놓는 신뢰입니다. 이때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됩니다. 용서는 단순히 타인을 향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수용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범하고 실망스러운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나, 반복되는 약함 속에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포기가 아니라 진실과의 화해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까지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질서가 아니라 혼란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느님, 즉각적인 해결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 우리를 머무르게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가장 급진적인 신뢰입니다.
잘 듣는 것, (순종) 잘 보는 것, (기도와 관상) 숙고한 연후에 말하는 것 (사랑에 대한 응답)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내적으로 필요한 것들과 은총의 선물을 정직하게 나누며, 서로의 다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견딤이 필요한지, 분노와 좌절을 촉발시키는 사람, 언쟁이나 험담하는 데 빠져 매우 험한 말을 하는 사람, 책임과 일을 전가시키고 요령을 피우며, 평화를 만들어 가는 데 방해하는 사람, 자신이 진리인 양 거짓말을 지껄여 대는 사람, 진실이 통하지 않는 최악의 역겨움을 발생시키는 사람, 이런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매우 큰 갈등이 따릅니다.
죄와 악은 관계성을 파괴시킵니다. 그것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데서 비롯되며 귀머거리와 장님과 벙어리가 되게 합니다. 살아 숨 쉬지만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때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내려가는 죽음, 내려놓는 죽음, 허용하고 놓아주는 죽음이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가난은 내적인 죽음으로 경험합니다. 내 중심성에 죽고, 자존심과 자만심에 죽음을 받아들일 때 관계의 현장은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됩니다.
하느님과 단절은 사람들과의 단절로 드러납니다. 그 결과 실존적 공허감에 사로잡힙니다. 실존적 공허의 충족은 하느님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비극과 불행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관계성은 평등을 전제로 하며 피조 된 모든 세계 안에서 형제적 관계를 형성하기에 자연스럽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안심하고 내려놓아도 됩니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우상도, 완벽이라는 환상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도. 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이 우리를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우리의 관계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선성을 반영하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과 삶 안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관계성의 인식과 의사소통으로 상호의존과 공동협력 안에서 자유롭게 선을 행하며, 기쁨과 희망에 찬 응답으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너에게로 흘러갑니다. 여기에 구원의 실재가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내가 변화되어 완전해지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분은 우리가 성공했을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 자리에서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가장 약해진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길을 배워야 합니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 애쓰는 길이 아니라, 더 진실해지기 위해 내려가는 길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움켜쥐는 길이 아니라, 이미 붙들려 있음을 믿고 놓아버리는 길을. 더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단단히 만드는 길이 아니라, 부서짐 속에서도 사랑받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길을.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가벼움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괜찮다는 깊은 신뢰에서 오는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