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성요셉과 아들 예수(1964)
작가 : 피에트로 안니고니(Pietro Annigoni, 1910-1988)
크기 : 켐퍼스 유채 95 x 149cm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산 노렌죠 대성당
교회는 예수님의 아버지 성 요셉을 기억하기 위해 3월을 요셉 성월로 정했다. 그런데 요셉의 위상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요셉은 마리아의 정배(淨配)라고 불리며 예수님의 양부(養父)로 불린다. 이 표현은 요셉이 정상적인 남편도 아버지도 아닌 참으로 이상한 존재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존경의 표시이던 아니던가는 그만두고 참으로 이상한 것이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성모님이 아들 예수의 잉태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아닌 성령의 작용임을 강조하기 위해선 요셉의 존재성은 정상적인 인간 사회의 남편과 다른 정배라는 개념이 되어야 했고 이것은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도 참으로 이상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다음 성화는 17세기 이태리의 귀도 레니(Guido Reni 1635)의 작품이며 얼마 전 까지도 전통적인 신자들에게 사랑받는 성요셉의 모습인데, 이것이 어떻게 첫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모습일 수 있느냐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닌 나이든 조부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요셉을 예수의 육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아니라는 면을 강조하다 보니 오늘의 모습에서 보면 참으로 어색하면서도 희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현대인들에게 성가족의 참 모습을 바로 알리기 위해선 바로 이런 시대착오적이며 희극적인 표현에서 벗어나야한다. 성 기능을 행사할 수 없는 무능한 늙은이의 모습이 예수 아버지의 바른 모습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 역사 안에서도 예언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이런 표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 성요셉을 멋진 모습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중에 성 요셉을 만난적이 있는데, 그때 나타나신 성 요셉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임을 보고 감격하면서, 그 후 성녀는 자기가 창설하는 모든 수도원 이름마다 성요셉의 이름을 붙일 만큼, 당시 교회가 강조하던 어색한 마리아의 정배 요셉이나 예수의 양부 요셉이라는 어색한 존재보다 멋스러운 존재로서의 요셉 성인을 공경했다.
현대 시대적 요청은 성 요셉을 이런 어색한 존재로 묶어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변신시켰는데 바로 노동자 요셉이라는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 요셉은 목수로서 가정을 꾸렸다고 했는데, 당시 목수라는 것은 오늘 말하는 나무를 다루는 사람만이 아닌 집 건축에 관계되는 현대적 의미의 기술자 수준의 사람이었으니 이런 관점에서 요셉은 노동자들의 수호 성인이 되기 충분했다. 여기서 ‘목수’로 번역된 희랍어는 텍톤(τέκτων)이다.
이것은 단순히 나무만 다루는 사람이 아니집을 짓는 건축 기술자, 돌과 나무를 다루는 장인,농기구를 만드는 기술 노동자를 포함하는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세기부터 이미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지만 성직자 수도자들이 안일한 생활을 하며 신자들로 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는데, 이것이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이처럼 노동의 가치를 증거하지 못하는 교회의 태도는 특히 일반 시민들이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종교가 인간의 아편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런 처지에서 교회가 자기 방어를 위해서도 결코 인간 기생충의 삶을 살지 않고 땀 흘려 살아야 한다는 내부의 교육과 함께 1956년부터 성 요셉을 노동자의 주보로 정해 사회적으로 5월 1일을 노동자의 축일로 기억할 때 교회가 요셉 성인을 노동의 모델로 제시한 것은 참으로 시기 적절한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나자렛이었는데 이곳은 예나 오늘이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살기가 너무 어려운 척박한 곳이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자렛 회당에서 강론하실 때, 군중들이 보인 처참한 반향은 서글픔마저 느끼게 한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루카 6,2-4)
이런 나자렛 출신의 시골뜨기 예수님을 충격과 감동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바로 예수님이 세포리스의 노동자 생활에서 익힌 체험적 교양의 결실이었다.
역사 고고학은 오늘도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나자렛에서 약 6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로마 문명의 도시 세포리스는 이렇다할 생계 기반이 없던 나자렛 사람들에게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좋은 일터였고 소년 예수님 역시 아버지 요셉을 따라 여기서 일하며 생활비를 마련했을 것이란 확실한 추정을 할 수 있고 이것은 예수님 인생에 경제 문제 뿐 아니라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작은 산골 사람 답지 않게 많은 문화적인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왕족들의 삶이나 도시의 삶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는데 이것은 요셉과 예수 부자가 생계의 터전으로 나자렛에서 몇 킬로 떨어진 세포리스(Seporis)라는 도시에 생계를 잊기 위해 성 요셉과 함께 일하려 다니면서 경험 안에서 배운 지식들이었다.
당시 세포리스는 나자렛에서 6킬로 떨어진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대도시였는데,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님과 요셉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세포리스로 출퇴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포리스와 나자렛은 가까운 도시이면서 도시의 성격이 서로 극명했기에 예수님은 이 사이를 왕복하시며 나자렛이라는 가난하고 폐쇄된 지역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시 세계를 움직이던 친로마적, 헬라화 된 선진도시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키울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은 형체로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인간들이 겪는 노동의 현실에 동참하면서 이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교양과 문화도 익혔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꾸릴 재산 획득의 수단이 아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 습득의 좋은 수단도 되었다.

이 작가는 이태리 출신으로 그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을 그릴만큼 알려진 인물화 작가였으나, 그가 몸 담았던 이태리 르네상스의 영향과 함께 사실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을 남겼고 특히 성가족의 가족관계 중 부자의 관계인 요셉과 소년 예수의 작품에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담았다.
건장한 아버지 요셉은 짙은 빛 작업복에 앞치마를 걸친 작업장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소년 예수는 이런 듬직한 아버지의 목공방의 자기 키보다 높은 작업틀에 온몸을 기울려 매달리듯 아버지의 솜씨를 익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인간 가족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들은 사랑의 전달처럼 아름다운 것이며 성가정의 요셉은 아들 예수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는 교사로 등장시키고 있다.
작가는 요셉의 옷 색깔을 감청색으로 처리한 반면 아들 예수는 블론드 머리에 붉은 옷을 입은 소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중세 성화에서 전통적으로 푸른 색은 하느님 신성의 상징인 반면, 붉은 색은 인성의 상징이기에 예수님의 초상화에선 항상 이 두 색깔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 아버지 요셉은 신성의 색깔을 아들 예수는 인성을 사용한 것은 참으로 대담한 표현이다.
작가는 아버지 요셉이 아들 예수에게 노동을 가르치는 모습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산 표징이며 아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으로서의 인격을 성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그안에 충분한 하느님의 신성이 있으며 요셉은 이런 예수를 돕기 위한 인간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도 생소한 표현이나 작가의 이런 태도를 통해 성 요셉과의 관계성 뿐 아니라 가정 노동 가족이라는 것이 하느님 사람에 근본적인 것이며 가정의 소중함은 노동이라는 가치속에 생명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인데, 참으로 우리에게 이해하기 힘든 과감한 표현이다.
건강한 사랑으로 영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스승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종교 교육의 책임이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 교육의 기본은 부모 관계에서 사랑으로 영글어진 순수한 관계가 노동만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어질 때 바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의 인간으로 변모되고 이것이 신앙의 바른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오늘 우리가 세상에 제시해야 할 듣고 보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매력을 줄 수 있는 참으로 생기있고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그 동안 교회 안에 잠재해 있던 정배나 양부와 같은 시대착오적 표현이 아닌 인간 삶의 기본인 노동의 수호자였던 요셉의 모습 부각을 통해 성모님의 동정 잉태 교리를 맞추기 위한 인위적인 것이 아닌 성 요셉의 바른 삶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가치인 노동을 제시함으로서 소년 예수의 아버지로서 좋은 스승을 역할을 했던 요셉을 새로운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아버지로서의 설득력있는 자질의 지닌 성요셉을 잘 표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