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계산을 넘어 하느님 은총 안에서 경험하는 눈뜸
우리는 너무도 쉽게 고통의 이유를 묻습니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누군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 오래도록 어둠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안의 오래된 셈법은 재빨리 질문을 꺼내 듭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저 사람에게 저런 일이 닥쳤습니까?” 이 질문은 얼핏 정의로워 보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세우려는 진지한 물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떨고 싶지 않은 인간의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고통을 ‘이유 있는 벌’로 정리해버리면, 나는 아직 안전한 자리에 서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원인과 결과의 표로 정리해버리면, 나는 그 아픔의 신비 앞에 함께 서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 앞에서 제자들이 던진 질문도 그러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입까? 이 사람입니까, 부모입니까?”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인간의 인과응보의 익숙한 방식 전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연민보다 분석을 먼저 하고, 품어 안기보다 판단을 먼저 하며, 함께 울기보다 설명하려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오래된 계산법을 단호히 끊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함이다.” 이 말씀은 고통 자체를 미화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눈먼 삶이 좋다는 뜻도 아니고, 아픔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인간이 만든 정죄의 틀을 깨뜨리시는 선언입니다.
고통은 단순한 벌의 증거가 아니며, 상처 입은 사람은 하느님께 버림받은 표지가 아니고, 결핍과 눈물의 자리는 오히려 하느님의 일이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복음은 우리를 깊이 흔듭니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어둠을 보며 원인을 캐묻고, 내 고통을 겪을 때조차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주님은 묻지 않으십니다. “누가 잘못했느냐?” 그분은 오히려 말씀하십니다. “이 어둠 속에서 내가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이 상처 위에 어떤 빛을 비출 것인가.” “이 막막함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일이 피어나게 할 것인가.” 신앙은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을 즉시 해석해버리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설명되지 않는 현실 한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것을 금방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손길이 일하고 있음을 신뢰하는 가난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낯설고, 어딘가 불편하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방식이라 보기에는 너무 소박합니다. 왜 굳이 흙을 만지십니까. 왜 굳이 진흙을 바르십니까. 왜 한마디로 즉시 밝아지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방식은 언제나 인간이 상상하는 화려한 해결과 다릅니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상처를 단번에 지워버리기보다, 그 상처를 통과하여 새 창조의 신비를 열어 보이십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던 창조의 손길이, 이제 진흙으로 눈먼 사람의 눈 위에 다시 얹힙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너의 어둠도 나의 창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너의 결핍도 버려진 조각이 아니라 내가 다시 만질 수 있는 자리라고.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어라.” 여기서 기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은총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은총은 그 사람의 순종을 통해 열매 맺습니다. 눈에 진흙이 발린 채 길을 가야 했던 그 사람의 발걸음을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막막합니다. 손에 쥔 것은 분명한 해답이 아니라 단지 한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갑니다. 묻지 않고 갑니다. 설명받지 못했어도 갑니다. 자기 눈앞에 빛이 생겨서 간 것이 아니라, 빛이신 분의 말씀을 믿었기에 갑니다. 여기서 믿음의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이미 다 이해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장된 결과를 확인한 뒤에 걷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말씀 때문에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길은 모든 신앙인의 길입니다. 기도 중에는 뜨거운데 일상에서는 멈추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들은 자리에서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믿음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이름은 참으로 깊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로암으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수도원의 복도에서, 공동체 식탁에서, 침묵의 방 안에서, 서운한 말을 들은 순간에, 오해받는 자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동의 자리에서, 내가 피하고 싶은 바로 그 관계의 현장으로 파견된 존재들입니다. 신앙은 높은 사색 속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눈뜸의 은총은 반드시 삶의 자리에서 검증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씻어라. 가서 용서하여라. 가서 참고 견디어라. 가서 먼저 인사하여라. 가서 네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여라. 가서 네 손에 쥔 판단을 내려놓아라. 가서 네 형제를 다시 보아라. 가서 가난한 이의 얼굴 안에서 나를 알아보아라. 이처럼 실로암은 장소이기 전에 삶의 순종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결국 도착해야 하는 자리, 자기 생각의 중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자리, 그곳이 실로암입니다.
복음은 단지 육신의 눈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어둠은 눈먼 사람의 눈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으로는 보았습니다. 율법도 알고, 전통도 알고, 판단하는 기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계신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실을 보았으나 진실을 놓쳤고, 기적을 목격했으나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만이 영혼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믿는 사람은 새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미 결론을 가진 사람은 은총 앞에서 놀라지 못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이 자기 생각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합니다. 영적 소경의 가장 깊은 비극은 보지 못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무지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지를 깨닫지 못하는 자기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자들, 눈먼 이들에게는 길이 되셨지만, 스스로 완전하다고 여긴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빛을 더욱 또렷하게 붙들게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길은 강한 자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아는 자의 우월함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아짐의 길, 낮아짐의 길, 비워짐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기를 크게 내세우는 대신, 하느님의 빛이 통과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작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눈뜬 사람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비운 사람입니다. 많이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많이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장면은 얼마나 자주 반복됩니까. 겉으로는 잘 보는 것 같으나 실은 아무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가난한 형제의 침묵을 보지 못하고, 상처 입은 자매의 떨리는 마음을 보지 못하고, 늘 웃고 있는 사람 안의 깊은 외로움을 보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친 한 사람의 도움 요청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서 사물을 분별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존재를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 것은 세상을 더 날카롭게 판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많은 사람으로만 보이던 이 안에서 상처 입은 양을 보게 되고, 불편한 사건으로만 보이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일이 아직 진행 중임을 보게 되며, 내 실패와 어둠 안에서도 은총이 길을 잃지 않았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는 선언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어둠이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약속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빛은 이미 와 있습니다. 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해도 빛은 이미 비추고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날에도 그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빛 앞에 서기를 원하는가입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을 보며 죄의 원인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드러날 하느님의 일을 기다리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된 것만 순종하려 하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아도 실로암으로 걸어갈 용기를 내는지. 나는 아직도 내가 본다고 확신하는 교만 속에 머무는지, 아니면 “주님, 저는 보지 못합니다. 저를 비추어 주십시오” 하고 가난하게 청하는지, 실로암 사건은 결국 한 사람의 치유 이야기이기 전에 모든 신앙인의 내면에서 날마다 다시 일어나는 복음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눈멀고, 날마다 파견되며, 날마다 씻김 받고, 날마다 조금씩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눈뜸은 단번의 성취가 아니라 평생의 은총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를 쉽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나는 어느 자리에서 아직도 진흙 바른 눈으로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가서 씻어라. 네 두려움을 씻어라. 네 교만을 씻어라. 네 판단을 씻어라. 네 오래된 상처를 씻어라. 그리고 보아라. 네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빛을 보아라. 그 빛은 세상을 지배하는 빛이 아니라 낮은 곳을 먼저 비추는 빛입니다. 단죄하지 않고 감싸는 빛,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빛, 심판의 칼보다 자비의 손을 먼저 내미는 빛입니다. 그 빛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압니다. 고통은 단죄의 표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시작될 수 있는 자리이며, 순종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눈뜸으로 가는 은총의 길이며,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패배가 아니라 진짜 빛을 받아들이는 영혼의 문이라는 것을. 그러니 오늘 우리도 조용히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을 알게 하소서. 제가 안다고 여기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원인을 묻기보다 그 자리에서 일하시는 당신을 경외하게 하소서. 진흙 바른 눈으로라도 당신 말씀을 따라 실로암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상처 속에서도 당신의 업적을 보고, 어둠 한가운데서도 당신이 여전히 세상의 빛이심을 제 삶으로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