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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알아본 순간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r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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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알아본 순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분을 알아본 순간부터 세상은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발밑의 흙은 전보다 부드러워졌고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구름의 가장자리는 더 오래 빛났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먼저 젖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분을 알아보기 전까지 나는 오래도록 숨고 싶어 헤매던 사람이었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면서도 마음은 늘 문 하나를 닫아 두고 있었고 누군가 다가오면 다시 그 문을 더 깊이 잠그곤 했다. 웃음은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늘 조용한 겨울 들판 같은 쓸쓸함이 따라다녔다. 그래서일까 그분을 처음 알아보았을 때 나는 기쁨보다 먼저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언젠가 더 시린 그리움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나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그분은 내가 숨기려던 그 쓸쓸함을 굳이 묻지 않았다. 무슨 사연인지 캐묻지도 않고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용히 곁에 서 계셨다. 마치 오래된 비를 맞고 있는 나무 옆에서 함께 젖어 주는 또 하나의 나무처럼. 그때 나는 알았다. 사람의 마음은 누군가가 대신 말해 줄 때보다 누군가가 함께 침묵해 줄 때 더 깊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길가의 풀잎도, 저녁에 돌아가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비에 젖은 창문에 맺힌 작은 물방울도 모두가 어디선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은 본래 기다림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오래도록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분을 알아본 날 내 안의 오래된 길 하나가 비로소 끝을 찾은 것 같았다.

 

그 길의 끝에는 아주 큰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비를 맞으며 천천히 젖어 가는 조용한 시간이 있었다. 사랑은 세상을 환하게 바꾸는 불꽃이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스며드는 비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차갑고 어딘가 쓸쓸하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면 온 마음이 이미 그 빗속에 서 있는 것처럼.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좋은 날이다.

 

바람도 부드럽고 하늘도 유난히 깊다. 세상이 오늘만큼만 늘 이렇게 아름답게 머물러 준다면 사람들은 서로를 덜 아프게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먼 길을 걸어 우리의 젖은 마음 사이로 조용히 들어와 왜 우리가 이렇게 오래 쓸쓸했는지, 왜 서로를 만나야 했는지, 왜 사랑이 늘 기쁨과 함께 눈물을 데려오는지, 그 이유를 하나씩 밝혀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알게 되리라. 지금까지 흘린 눈물도, 쓸쓸히 지나온 세월도 모두가 헛된 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비에 젖은 두 마음은 무너지기 위해 젖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비를 맞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조용히 웃게 될 것이다. 오래 헤매던 마음이 서로의 어깨 위에 마침내 내려앉았다는 것을 알면서.

 

이 세상 마지막 날은 바로 오늘이며, 오늘의 마지막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지금의 마지막 숨결은 바로 이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세상은 늘 내일을 이야기하지만 삶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작은 문 하나로만 나에게 들어온다.

 

어제는 이미 지나가 내 손을 떠났고 내일은 아직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삶의 모든 진실은 이 짧은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가. 나는 내 마음을 닫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 더 열어 두고 있는가. 나는 사랑을 미루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을 시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또 묻는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두려움 때문인가, 체면 때문인가, 습관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 때문인가. 마지막 날을 사는 사람은 많이 가지려 하지 않는다. 마지막 시간을 사는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도 없다. 마지막 순간을 사는 사람은 단 한 가지를 선택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지금 용서하는 것. 지금 손을 내미는 것. 지금 선이 흐르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 그래서 이 세상 마지막 날이 오늘이라면 나는 조용히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서 있는 동안 나는 이미 조금씩 더 깨어 있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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