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우리의 믿음
프란치스칸 영성의 빛에서 본 세 가지 진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세 번에 걸쳐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가르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귀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와 욕망이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의 수난 예고는 결국 우리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는 세 개의 거울과 같습니다.
1. 영광을 원하는 믿음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말립니다. “그런 일은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는 틀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사람의 생각으로 사랑했을 뿐입니다. 베드로가 원했던 메시아는 로마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는 승리의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은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패배처럼 보이는 길, 버림받는 길, 십자가의 길.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예수님의 방식까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한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메시아를 믿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 자리 다툼 속에 묻힌 말씀
두 번째 수난 예고 직후 제자들은 길 위에서 다투었습니다. “누가 더 큰가.”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현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말씀은 들립니다. 복음도 읽습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같은 질문이 울립니다. 누가 더 인정받는가, 누가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앞에 서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아이를 가운데 세우며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분은 인과응보의 논리로 무장한 사회질서를 뒤엎으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구조입니다. 프란치스코가 평생 붙잡았던 것도 바로 이 복음의 구조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올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나라입니다.
3. 두려움 앞에서 멈춘 발걸음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배신, 모욕, 채찍, 십자가, 죽음,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라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단지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 중심의 삶이 무너지는 사건입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순간, 용서를 선택하는 순간, 손해를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 때문에 낮아지는 순간,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4. 수난 예고는 사랑의 방식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세 번이나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말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 세상 속에 뿌리를 내리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 위에서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이 처음부터 말씀하시던 그 진실을 천천히 이해하게 됩니다. 부활은 십자가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알아듣지 못한 귀 (수난 예고와 우리 믿음의 성찰)
수난 예고와 일상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믿음의 실재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길 위에서 주님은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때리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은 단지 미래의 사건을 알리는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밝히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랑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성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겸손의 실재는 관계안에서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죽음의 현장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 더 큰 소리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영광을 향한 기대였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고, 고통을 피하고 싶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를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 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 이야기가 결코 이천 년 전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앞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그는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있던 메시아는 고난받는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을 뒤집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스승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인과응보라는 사람의 방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 이 장면은 우리 믿음의 깊은 진실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정말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인지는 일상의 관계 속에서 드러납니다. 누군가 내 말을 무시했을 때, 누군가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을 때, 누군가 내 마음을 거칠게 건드렸을 때, 그 순간 내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대개 복음이 아닙니다. 억울함이 올라옵니다. 자존심이 일어납니다. 내가 옳다는 설명을 하고 싶어집니다. 상대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메시아를 원했던 베드로가 결코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지나간 뒤 제자들은 길 위에서 다투었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주님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세우실 나라에서 차지할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일상적인 모습을 너무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복음을 읽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도합니다. 기도의 수를 헤아리고 희생을 셈하고 재물의 양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아주 미세한 순간이 오면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같은 질문이 올라옵니다. 누가 더 인정받는가, 누가 더 중요해지는가, 누가 더 중심에 서는가, 공동체 안에서, 형제와 자매 사이에서, 가족과 동료 사이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내 방식이 선택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이 더 주목받을 때, 마음은 조용히 불편해집니다. 그 불편함은 겉으로는 작지만 내 안에서는 오래 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우리 삶 안에서 다시 들려옵니다. 주님은 한 아이를 가운데 세우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올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작은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은 큰 사람이 되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작아지는 사람을 통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작아짐은 거창한 사건 속에서 이루어지기보다 대개 아주 평범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말을 한마디 덜 하는 선택, 내가 옳다는 설명을 잠시 미루는 선택, 상대의 피곤함을 먼저 헤아리는 선택, 내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는 선택,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조용히 자랍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에서 주님은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배신을 당할 것이다. 조롱을 받을 것이다.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제자들은 몹시 근심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숨기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는 단지 큰 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내 중심이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일상의 관계 속에서 십자가는 아주 작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 말이 오해받았을 때, 내 의도가 왜곡되었을 때, 내 수고가 보이지 않을 때, 내가 설명할 기회조차 없을 때, 그 순간 우리는 두 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를 지키는 길, 사랑을 지키는 길, 나를 증명하는 길, 관계를 지키는 길, 바로 그 갈림길에서 믿음은 추상이 아니라 실제 선택이 됩니다. 믿음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요동치는 순간에도 내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다시 선택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먼저 멈춤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곧바로 말하지 않는 것, 즉시 되받아치지 않는 것, 내 해석이 전부라고 믿지 않는 것, 이 작은 멈춤은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주님이 수난을 세 번이나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을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방식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 사랑은 때로는 패배처럼 보이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며 때로는 침묵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십자가라는 깊은 뿌리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노래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선이십니다. 모든 선이십니다. 지상의 모든 선이십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나무가 아니라 사랑이 피어나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천천히 깨닫게 됩니다. 부활은 십자가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그 순간마다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