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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Mar 09,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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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용서와 프란치스칸 영적 권고를 따라 용서와 자비에 대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그분의 심장에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용서는 단순히 한 번 눈감아 주는 착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이며, 인간 존재를 새롭게 빚는 창조의 숨결이며 은총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전체를 한 줄기로 꿰뚫는 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로부터 흘러오는 자비의 강, 곧 용서의 강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부터 이미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이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육신의 마비보다 더 깊은 마비, 곧 죄와 두려움과 자기 정죄와 관계의 단절로 굳어버린 영혼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용서는 언제나 이처럼 관계 회복의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끊어진 관계, 이웃과 틀어진 관계, 자기 자신과도 화해하지 못하는 내면의 갈라짐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창조적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이 말씀은 단지 윤리적 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라는 초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이에게도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인간의 고상한 인품이 아니라, 아버지의 완전하심에 접속된 삶의 표지입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서도 용서는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이 청원은 무서운 상호 조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더 깊은 영적 진실을 드러냅니다. 용서받지 못해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거래가 아니라 흐름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자비가 내 안에 갇히지 않고 타인에게로 흘러갈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자비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받은 것을 쌓아두고, 용서의 은총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리면, 그 순간 은총은 흐르지 못하고 썩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권고는 신약의 용서 가르침을 아주 날카롭게 밝혀 줍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병이 자기 뜻을 자기 것으로 삼는 악이라고 꿰뚫어 봅니다. 내 상처도 내 것, 내 의로움도 내 것, 내 분노도 내 것, 내 판단도 내 것, 심지어 내가 받은 은총조차 내 업적으로 붙잡아 두려는 마음. 이 소유의 영성이 용서를 가로막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내 상처에 대한 소유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억울한 일도 실제로 있었을 수 있습니다. 불의는 불의이고, 악은 악입니다. 신약성서는 결코 악을 선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악을 마지막 말로 남겨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폭력은 그분의 몸을 찢었지만, 그 폭력조차 자비의 문을 닫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용서의 가장 깊은 본질을 봅니다. 용서는 악을 가볍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악보다 더 큰 사랑 안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바로 그 십자가의 자리에서 용서를 배웁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복음은 사상도 이론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수난에 실제로 참여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적 권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그의 잘못보다 먼저 그의 고통을 볼 수 있는가. 당신은 판단하기 전에 울 수 있는가. 당신은 단죄하기 전에 품을 수 있는가. 당신은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대신, 자비의 이름으로 그를 하느님께 다시 맡길 수 있는가.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와 배반자와 실패한 이들 곁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이는 죄를 묵인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가 정죄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짐 속에서 열린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용서받았기 때문에 변화되었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여인은 많이 사랑받았기에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변명보다 먼저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습니다. 큰아들의 분노는 율법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보다 더 넓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용서입니다. 용서는 공정함을 폐기하지 않지만, 공정보다 더 깊은 차원인 자비의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프란치스코의 권고 역시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라고 요청합니다. 누군가 죄를 지어도 그를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며, 그를 위해 주님 앞에서 울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참된 작은 형제는 남의 허물을 드러내어 자신의 의를 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제의 상처를 보며 자기 안의 가난을 기억합니다. “나도 은총이 아니면 저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자각이 없으면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의로운 편에, 상대를 잘못한 편에 완전히 고정시키는 사람은 끝내 자비의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하느님의 자비로 겨우 서 있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죄 앞에서도 돌을 들기보다 눈물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신약성서의 사도 바오로도 같은 길을 말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기에는 용서의 순서가 분명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 다음, 그 용서가 우리 안에서 형제애의 형식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억지로 만들어 내는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화해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또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십시오.” “서로 참아 주십시오.” 이 모든 권고는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분노를 붙들고 있는 자아를 내려놓고, 공동체를 살리는 사랑의 질서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콜로새서와 에페소서의 권고는 프란치스칸 영성과 깊이 맞닿습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용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참는 듯해도 속으로는 계속 계산하고,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으로는 장부를 적어 내려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빚을 지운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를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보기 시작하는 능력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가난은 바로 여기에서 빛을 냅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의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자기 우월감도, 자기 정당함도, 자기 판단권도 움켜쥐지 않습니다. 그는 빈손으로 하느님 앞에 서기에, 형제 앞에서도 빈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영혼만이 진정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하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우리는 대개 심판이 자비를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했으니 벌을 받아야 하고, 상처를 주었으니 되갚아야 하며, 넘어졌으니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신약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느님의 마지막 말은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회개하는 이를 일으켜 세우는 자비입니다. 이 자비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하느님의 엄격함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영적 권고에서 거듭 경계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죄는 상황 탓으로 돌리고, 남의 죄는 인격으로 규정합니다. 자기에게는 설명을 주고, 남에게는 낙인을 찍습니다. 그런 영혼은 자비를 말해도 실제로는 심판의 구조 안에 삽니다.

 

요한 1서 역시 용서의 바탕을 밝혀 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느님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여기서 죄의 고백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신약의 용서는 진실을 덮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은총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값싼 화해가 아닙니다. 잘못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도 아니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무조건 빨리 잊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오히려 진실을 진실로 직면하면서도, 그 진실이 증오의 굴레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프란치스칸적 용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를 통과합니다. 억울함이 있는데도 없는 척하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는데도 덜 아픈 척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고통을 내 무기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 드립니다. 그때 고통은 복수의 칼이 아니라 자비의 도구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도 용서의 학교입니다.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그 치욕스러운 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시며,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용서가 단지 과거의 죄책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다시 사명 안으로 불러들이는 회복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사람을 수치 속에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형제의 넘어짐을 구경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참된 순명과 겸손은 넘어지는 형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잊는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아직도 그 사람 안에서 시작하실 미래를 믿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신약 전체를 흐르는 용서는 세 가지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첫째,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진실입니다. 둘째, 그 용서를 받은 사람은 형제를 용서하는 삶으로 부름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이 용서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역사와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적 권고는 여기에 네 번째 차원을 더합니다. , 용서는 겸손한 사람만이 끝까지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비하하는 감정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유입니다. 심판자가 내가 아니라는 것, 최종 판단과 구원은 내 손에 있지 않다는 것, 나는 다만 하느님의 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작은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 인식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을 벌하는 데 삶을 소진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감상적인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중심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혹독한 수련입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끝까지 따지고 싶어 하는 마음, 상대가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는 집착, 그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영적 가난의 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작은 형제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상처를 안고도 원한의 왕좌에 앉지 않는 사람, 억울함 속에서도 자기 영혼을 독으로 채우지 않는 사람, 형제의 허물 앞에서 자기 우월감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떠올리는 사람, 그가 곧 용서를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약도 그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깨어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에 깨여있음이 마음의 품을 넓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은총 안에 머물러야 가능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용서는 더욱 오래 걸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관계의 거리를 두어야 할 수도 있고, 악한 구조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미움이 자신의 최종 언어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품위이며, 프란치스칸 영성의 향기입니다. 결국 용서는 길에서 길을 만나 길이 되어가는 삶으로 하느님을 닮아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 용서를 몸으로 번역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그 자비를 공동체의 삶으로 풀어냈고, 프란치스코는 그것을 가난과 작음과 형제애 안에서 다시 살아 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신약성서의 한 주제가 아니라, 복음 전체의 심장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적 권고는 그 심장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무조건 신뢰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방관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처보다 더 크신 하느님께 판단을 맡기고, 내 영혼이 증오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다시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용서는 내가 상대를 위해 해주는 큰 선행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내 안에 열어 두신 은총의 문이었다는 것을. 참으로 복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았음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를 하느님의 자비 안에 놓아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프란치스칸적인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로움조차 소유하지 않고, 자비가 흘러가도록 자신을 비워 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를 심판의 사람이 아니라 자비의 사람으로 빚어 주소서. 형제의 잘못 앞에서 돌을 드는 손보다. 눈물로 기도하는 마음을 먼저 주소서. 제가 받은 용서를 잊지 않게 하시고 그 용서가 제 안에 갇히지 않고 흘러가게 하소서. 제 상처를 제 우상으로 붙들지 않게 하시고 그 아픔마저 당신 손에 내어 맡기는 가난을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당신 평화의 도구일 뿐 아니라 당신 용서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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