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수면 아래서 건져 올린 가난의 노래
아침 빛은 소리 없이 낮은 담장을 넘습니다. 그 빛은 화려한 치장을 거부하고, 가장 어둡고 습한 구석부터 조용히 스며듭니다. 나는 그 빛 아래서 내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봅니다. 겹겹이 쌓인 의식의 층위를 걷어내면, 그곳엔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거대한 결핍과 계산의 흔적들이 화석처럼 굳어 있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주머니가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 존재를 지탱하던 가장 은밀한 기둥들, ‘내가 옳다’는 완고한 신념, ‘내가 더 희생했다’는 자기연민의 기억, ‘결국 나는 이해받아야 한다’는 지독한 인정의 욕구가 뿌리째 뽑혀 나가는 사건임을 마주합니다. 무너짐이 주는 경이로운 평화를 경험한 사람은 가난의 신비를 일상 속에서 살아냅니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은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는 감출 비밀이 없고, 자신을 증명할 명분도 필요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벽이 무너진 자리입니다. 지킬 성벽이 없으니 적군도 없고, 잃을 것이 없으니 비로소 두려움의 감옥에서 해방됩니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를 지배하던 ‘생존의 공포’가 비움의 빛 앞에서 녹아내립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나의 진심을 왜곡하고, 누군가는 나의 침묵을 오만으로 읽어냅니다. 예전의 나는 그 오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내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수천 마디의 말을 쌓아 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의식적인 반격의 본능을 잠시 멈춥니다. ‘내가 옳다’는 비대한 자아의 빵을 내려놓고, 그 허기진 자리를 하느님의 자비로 채웁니다. 텅 빈 공간에 고이는 것은 차가운 소외가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부드럽고 투명한 평화입니다.
단순함은 나를 설명하려는 강박에서 놓여나는 것이며 기쁨은 자아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던졌을 때 찾아오는 영혼의 가벼움이고 십자가는 자아의 중심이 전복되는 자리였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종종 십자가라는 고통을 건너뛰고 부활의 영광만을 움켜쥐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형 없는 변화이며, 죽지 않은 자아가 꿈꾸는 기만적인 환상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몸에 새긴 오상의 흔적은 고통의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사건이며 백기를 들고 항복을 선언한 실재였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쌓아온 모든 명분이 발가벗겨지는 자리입니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절박한 질문 앞에, 내가 의지하던 모든 세상의 끈이 끊어질 때 남는 것, 그 벌거벗은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바로 참된 가난입니다. 부활은 자아의 연장이 아니라, 완전히 죽은 자 위로 돋아나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질서입니다.
내 안에 비워진 공간, 그곳이 곧 하느님의 자리였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겪는 수치와 오해, 내 정당성이 짓밟히는 그 지점이 바로 나의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나를 변호하기를 포기하고 그 모든 혼란을 하느님께 오롯이 맡겨드릴 때, 내 무의식의 지배권은 비로소 나에게서 하느님께로 넘어갑니다. 그 침묵의 용광로 속에서 비대한 자아는 타버리고, 그 재 위에서 자유라는 이름의 꽃이 피어납니다. 가난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넓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차지한 공간이 적어질수록, 내 안에서 하느님이 숨 쉬실 공간은 커지고 내가 소유의 손길을 거둘수록, 형제들이 머물 자리는 넓어질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 안의 복잡한 계산서들을 불태웁니다. 누가 더 높고 낮은지, 누가 더 인정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목록을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소박한 숨 한 줄기와 “우리는 모두 연결된 형제다”라는 떨리는 고백뿐입니다. 길가의 들꽃처럼, 자신의 이름을 고집하지 않고 피었다 지는 그 단순한 순종을 닮고 싶습니다. 내 말의 무게를 줄이고, 내 자존심의 부피를 깎아내어, 당신이 온전히 거하실 수 있는 빈 들판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이제 무거운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작은 형제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의 존재는 이미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