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주는데
이런 단식의 의미와 목적을 어제 독서의 기도 제2 독서에서
성 레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제정한 이 사순절을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써만 아니라,
우리의 악습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 단식을 행함으로써 지내야 합니다.
거룩하고 합당한 단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애긍시사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애긍시사라고 하는 자선 행위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우리가 실천하는 이유는
미용 단식이나 건강 단식이 아님은 물론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자기학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가 단식하라 하니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레오 교황이 얘기한 대로
하나는 악습을 끊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행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는 자기 사랑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이고,
미용을 위해 단식하는 것도 자기 사랑의 단식이지만
악습을 끊는 것이 최고의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단(斷) 곧 끊는 것 중의 끊는 것은 단식(斷食)이 아니라
단욕심(斷慾心)이요 단악습(斷惡習)일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하게 살게 하고 행복하게 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가치 있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악습을 끊는 것보다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레오 교황은 얘기하는데
이것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 받은 그대로의 인격적 단식입니다.
오늘 독서는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기 위한 단식을 얘기하고
오늘 복음은 신랑의 수난과 함께하는 Compassion의 단식을 얘기합니다.
옛날 우리 신자들은 성미를 모아 바쳤지요.
이것은 성미(誠米)라고 할 수도 있고 성미(聖米)라고 해도 좋을 텐데
사순 시기 매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형편껏 한 숟가락 또는
한 움큼씩 떼어 놓은 쌀이었지요.
이것은 지금 돈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뜻깊게 다가옵니다.
쌀 한 톨이 귀하던 때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번에 툭 내는 것보다 매 끼니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턱내는 것은 금액으로는 더 많은 것을 주는 것이겠지만
성미는 매 끼니 가난한 이를 생각하며 나누는 것이기에
더 정성과 사랑이 들어간 것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 북한 일할 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문과
주님의 기도를 제가 짓고 식사 때 바치는 기도도 지었는데
그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굶주리는 북녘의 형제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사순절만이라도 굶주리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이 기도를 다시 바쳐야겠습니다.
그러면 식욕이나 식도락으로 밥을 먹지 않게 하고
사랑으로 밥을 먹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