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슬픔 (Sorrow, 1882)
작가 : 빈센트 반 코흐 (빈센트 반 코흐)
크기 : 44.5 x 27cm
소재지 : 네델란드 빈센트 반 코흐 미술관
사순절은 신앙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정해진 교회의 전례시기이다. 단식이나 금육이나 기도와 같은 것은 바로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닮기 위한 긴 수행이 바로 사순절의 목적이기에 여러 성서적 교훈과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방법으로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
신앙의 수행이라는 것 역시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습관성이 되기 쉽고 이것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형식으로 전락되기 쉬우며, 복음적 가치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위선과 불명예로 남을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실재 체험으로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이런 것이 반복되면 예수님이 가장 싫어한 위선과 이중성을 부채질할 수 있는 신앙의 독이 될 수 있다는 면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 중에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요한복음 8장 1-59) 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정확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일방 죄에 대해서는 준엄한 권고를 하셨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많은 이 세상! 사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 네 손이나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라.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 보다, 불구자나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태 18,6-9)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 대해선 어느 종교 지도자에게도 볼 수 없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의 인간적인 약한 심성 탓에 죄에 빠진 죄인에 대해선 더 없는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셨다.
즉, 죄에 대해선 단호하나 죄인에 대해선 더 없이 자애로운 태도로 대하셨으며 간음한 여인에 대한 태도에서 이것이 너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 당시 교회는 간음을 용서 받을 수 없는 중한 죄로 여겨 돌로 처죽이는 형벌만이 유일하다고 여기는게 불문열의 법이었다.
오늘 이 여인 앞에 등장한 율법학자들은 바로 이런 교회의 실재적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헌데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으로 율법학자들을 물러나게 만들고 돌에 맞을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셨다.
교회는 바로 이런 가르침의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교회 역시 어떤 때 자기 조직 유지를 예수님의 말씀 보다 더 우위에 두면서 죄인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율법학자의 모범을 자주 보이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이 작품은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크리스챤들이 지녀야 할 죄인에 대한 태도를 너무도 잘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네델란드의 명망있는 목사를 부모로 태어나 그 역시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신학교를 지원했으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그의 언어적 재능 때문에 정식 목사가 될 수 없다는 판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복음에 대한 열망 때문에, 목사가 되지 못해도 평신자 자격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보르나쥬라는 탄광 지대에 가서 평신자 선교사로서 삶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곳 광부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그는 참으로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의 형제였던 예수님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또 다른 예기치 못한 실망스러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의 가난하고 비참한 광부들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가 성직자로서의 지녀야 할 품위를 깨트린다는 판단을 한 상부 기관이 그에게 선교비 지원을 중단함으로서 그는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지면서 목사로서의 삶 역시 그에게 큰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이런 갈등의 시기에 있었던 어떤 창녀와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가 목사인 아버지와 절연하고 동생의 경제적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모델로 만났던 시엔(Sien)이라는 거리의 여인과의 관계를 그린 것이다.
당시 그녀는 딸을 가진 처지에서 또 임신을 했으나 생계를 잊기 위해 거리에 나서야 했던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었다.
작가는 이 여인을 만나면서 사회가 멸시하고 위험시하는 창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위로와 힘이 필요한 중생으로 여겨, 딸과 이 여인을 다정히 대해주고 이 여인이 출산을 했을 때 마치 예수님의 성탄처럼 새 생명을 축하까지 하면서 이 여인을 모델로 6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그중의 하나였다.

이 여인은 창녀이면서도 창녀로 살기에도 결격이 여자였다. 얼굴은 곰보이고 알콜 중독에다 성병까지 앓고 있으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몸을 팔고 있으나 참으로 어디 한군데에도 의지할 곳이 없는 불운한 처지였다.
작가는 이 여인의 불행과 목사의 삶을 살고 싶은데도 제도적인 모순으로 목사로서 쫓겨난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 해서 이 여인과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명망있는 목사 집안에서 이것을 용납했을리 만무했기에 격렬한 반대를 받으면서 다시 큰 슬픔과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이 여인은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를 감싸고 있는 불행의 마성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자살로서 인생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반 코흐는 이런 참상을 보면서 이 작품을 남겼다. 자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난한 여인이 아기를 팔에 안고 있거나 가슴에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난다. 그 여인에게서 나의 약함과 남루함의 모습을 보게 된다”라고 썻다.
우리는 많은 순간 신앙의 언어라는 것이 현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자기도취가 아니면 듣는 사람에게 자기를 속이거나 아니면 실망시키는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태도의 허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너무 자주 이런 것들을 보고나면 신앙이라는 것을 현실을 표현하지 못하는 허황한 공상의 언어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참으로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표현하는데 너무 진지했기에 이 비참한 현실의 여인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작가는 사도 바울로의 다음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며 산 인간이었다.
교회란 집단으로서의 의미만이 아니라 여기에 속한 모든 신자들 하나 하나가 가장 진실한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작가가 오늘도 교회안에서 설자리를 찾기 어려운 열악한 심성의 인간들을 따뜻이 받아 들이기를 주저하는 우리들의 정서에 큰 경고를 주고 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간음한 여인에게 돌팔매를 던지는 바리사이는 아니더라도 우리 삶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위선적 경건함에 대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 작품은 참으로 오늘 우리의 크리스챤 신앙 쇄신에 너무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극제이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간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