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에 왜 교회는 초를 봉헌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은 초처럼 세상의 빛이시니
주님께서 봉헌되신 것처럼 초도 봉헌되는 것이고
우리도 주님과 초처럼 봉헌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모에 의해 봉헌되고 세상의 빛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스스로 봉헌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초처럼 자신을 태움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에 관해 전에 많이 생각했던 것이 생각나면서
그러나 이제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뭐가 되려고 해서 되기보다 초처럼 저를 태우다 보면 빛이 되겠지요.
사랑하면 되지 빛이 되려는 것은 유명인 되는 것처럼 욕심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다 보면 빛도 되는 것입니다.
불을 피우고 태우면 불에서 빛도 나오고 열도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수도 생활을 이만큼 하고 나서야
축성생활자들의 날인 오늘 이런 성찰과 반성을 합니다.
그런데 불을 피우고 태워 열과 빛을 내되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화의 불이 먼저 타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말라키서의 말씀처럼 제련사와 정련사이신 주님께서
붙여주신 불로 시작되고 지속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 보면 사랑한다는 수도자에게 화가 더 많습니다.
사랑의 불이어야 하는데 분노의 화가 더 많은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화를 찾아보면 화(火)라고 나오고, 그 뜻풀이를 보면
‘못마땅하거나 언짢아서 생기는 노엽고 답답한 감정’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불에 이런 불순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만한 너’이기를 바라는 욕심이 함께 자리하고,
그럴 때 사랑하는 것만큼 ‘그렇지 못한 너’에 대해 화가 나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성숙한 수도자란 수도 생활에 관한 공의회 문헌의
그 ‘완전한 사랑(Perfectae Caritatis)’을 향해 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은 정화에서 시작되고 점차 열을 내고 빛을 내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한 수도자들이 저를 포함하여
이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는 수도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만이라도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기를 바라고 빕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