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어제 바오로 회심 축일 바로 다음 날
디모테오와 티토 축일을 지내는 뜻은 누구나 다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합니다.
디모테오와 티토를 바오로 사도가 자기 제자요 아들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있었기에 디모테오와 티토는
그의 제자와 아들이 되어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고,
이런 흐뭇한 제자와 아들들이 있었기에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시작한 전교 활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된 것이니 이처럼 부럽고 흐뭇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관계도 이런 관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복음적이고 은사적인 관계를 꿈꾸기보다 그저
인간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만 되어도 좋겠다며 관계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는 바오로 사도와 두 제자 디모테와 티토 간의 관계라고 할 수 없지요.
제가 생각할 때 이들의 관계는 기도해주고 안수해주는 관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과거 자신이 안수해줬음을 상기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수해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령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세상 아버지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렇습니다.
생선이나 달걀을 주는 것보다 성령을 주시는 것이 더 좋은 것이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뭘 한다면 물질 선물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해줄 것이고 청원 기도해준다면 성령을 빌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인간적인 친교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같이 살아가는 은사 공동체가 될 수 있는데
문제는 의외로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해줘도
서로를 위해선 기도하지 않거나 이런 기도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만 해도 저를 위해서나 가장 가까이서 같이 사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별로 기도하지 않고 멀리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주로 했었는데
얼마 전 그 이유를 깨달아 알게 된 다음부터 기도하게 되었지요.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바라는 것도 많고 불만도 많습니다.
사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상처를 더 많이 주고받게 되기에
사랑도 가장 많이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미워하게도 됩니다.
그리고 미워하고는 미움의 괴로움 때문에 용서하려 그리 애쓰면서도
정작 그의 성화를 위해서 기도해주거나
용서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해달라고 나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이제 알았다면
그리고 바오로 사도와 디모테오와 티토에게서 가르침과 자극을 받았다면
오늘부터라도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공동체가,
성령을 빌어주는 은사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