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시어,
제가 임금님께 당하는 이 억울함을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
오늘 저는 다윗과 비교하면서 사울을 보겠습니다.
물론 사울과 비교하며 다윗을 보기도 하겠습니다.
첫째는 하느님께로 치고 올라가는 것 문제입니다.
인간 간의 문제가 있을 때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인간적인 차원에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께까지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하느님 안에 머물지 못하며
그러기에 계속 관심과 시선이 문제로 삼는 그 인간을 향하게 되고 쫓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사울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누구 뒤를 쫓아 이렇게 나오셨단 말씀입니까?
임금님께서는 누구 뒤를 쫓아다니십니까?
죽은 개 한 마리입니까, 아니면 벼룩 한 마리입니까?”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고작 개나 쫓고 벼룩이나 쫓으면 되겠습니까?
자기가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라는 거룩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 뜻을 찾지 시시하게 그리고 초라하게 인간의 뒤나 쫓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어제 말씀드렸듯이 화가 나더라도 인간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화를 하느님께까지 가지고 올라가 기도하는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히지 않고 하느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훌륭합니다.
임금이고 나이 많은 사울보다 성숙합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울이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자기를 중심으로 나를 죽이려는 자나 적대자로 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께 기름부음받은이로 보고 있습니다.
사울은 밑에서 노는데 다윗은 위에서 노는 것이며 그래서 고상하고 성숙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또 다른 측면에서 보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어제 사울은 한 가지 약속 곧 “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사울은 요나탄에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어제 그리 약속했는데 오늘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죽여야겠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 그 안에서 살아계시지 않게 됐고,
반대로 주님께서 살아계시지 않을 때 사울은 다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든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윗보다 사울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기보다 사울처럼 많이 합니다.
시선을 하느님께 두고 하느님 안에 머물기도 하다가 이내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고,
하느님 안에 머물기에 하느님께서도 내 안에 살아계시다가도
인간에게 시선을 돌리는 순간 이내 죽어계시고는 하잖습니까?
이런 우리 자신에 얼마나 깨어있어야 하는지,
살아계신 하느님께 얼마나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하는지 명심해야겠습니다.
